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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면 법기리 도요지와의 인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B020203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법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종봉

사기장 고 신정희의 큰 아들인 신한균 사기장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현재 지산마을에서 도자기를 굽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를 찾은 봄날의 어느 저녁에 신한균 사기장은 우리나라 도자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가운데 양산과 관련된 것이 있어서 더욱 귀를 기울이게 했다.

신한균의 말을 인용해 본다. “일본에는 다도문화가 발달해 있어서 차사발이 많아요. 그 중에는 우수한 우리나라 차사발도 되게 많거든요. 그 많은 우리나라 우수 차사발 중에 70퍼센트가 이 양산에서 건너간 거라요.”

“여기 이 차사발은 부산포를 통해가 일본으로 건너갔었던 기고 여기에 대한 역사 자료에 대해서는 『우리 사발 이야기』에 잘 정리해 놨어요.”

“옛날에 양산 장흥고하고 양산 법기리 요지는 진짜로 엄청난 곳이었어요.” 신한균이 처음 양산 법기리를 주목하게 된 것은 그의 선친인 고 신정희 사기장이 문경새재에서 이곳 양산으로 작업장을 옮겨 오게 된 이유라고 한다.

신정희 사기장은 일본인과 교류하면서 일본인들 사이에 자주 ‘호키리(법기리)’가 오르내리는 것을 듣고 그 중요성을 인식했던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법기리에서 가장 많이 생산한 것이 일본인들이 이라보다완(伊羅保茶碗)이라 부르는 ‘주문 양산 사발’이라고 한다. 이 사발의 분류명이 ‘이라보’라는 것은 첫째, 일본의 『만엽집(萬葉集)』에 나오는 이라(伊羅)라는 쐐기풀에서 유래되었고, 둘째 일본의 차서(茶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만보전서(万寶全書)』에 나오는 구절과 같이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아 안달이 난다.’해서 붙여진 이름으로서 그 당시 일본 차인들이 양산 약토 사발을 간절히 원했던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차사발은 일본 국보 26호인 '이도다완(井戶茶碗)'에 버금갈 정도의 대접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부가 현재 노무라문화재단의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신한균은 일본인이 ‘이라보’라 부르는 차사발을 ‘주문 양산 사발’이라 부르고, 이 사발의 유약과 형태적 특성에 따라 양산 이중유 사발(片身替伊羅保, 카타미카와리 이라보), 양산 약토 사발(黃伊羅保, 키 이라보), 양산 거친 아리랑 굽 사발(釘彫伊羅保, 구기보리 이라보)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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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약토 사발

현재 양산 법기리 요지는 16~17세기의 조선백자 가마터로 사적 제1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창기사발’ 가마로 구전되어온 가마터로 마을 뒷산 기슭에서 산 위까지 여러 기(基)의 가마자리가 산재해 있다. 산기슭의 가마가 대체로 17세기의 것이고 산 위의 가마가 16세기의 것인데, 처음에는 산 위에서 시작하여 점점 밑으로 내려온 것 것으로 보고 있다.

산 위의 도자기 조각은 백자들로 사발·대접·접시 등이 대부분이며, 그릇 안쪽 바닥에 원각(圓刻)이 있고 굽은 모래가 섞인 내화토를 빚어 받쳐 구웠으며, 드물게 녹청자 조각도 발견된다. 산기슭의 가마터에서 채집되는 자기조각도 모두 백자인데, 산 위의 것보다 투박하고 굽이 두터우며, 오목굽에 가까운 것과 죽절(竹節)굽·평저(平底)굽이 있다. 양산 법기리 요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일본도 함께 하고 있다.

신한균은 2006년 일본 노무라문화재단의 타니아키라[俗晃] 학예부장으로부터 양산 법기리 요지에 대한 발굴 제안을 받은 바 있다.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역사의 비밀의 문이 양산 법기리 요지라는 인식을 하고 발굴에 대한 비용도 일부 부담하겠다는 의견도 함께 개진했다고 한다.

신한균은 양산 법기리 요지를 발굴하여 세미나 등 고증을 거쳐 관광지로 개발하고, 깨진 사금파리를 이용하여 실물을 빚어 전시하는 공간을 만들게 되면 양산이 국제 관광지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그는 지산리가 도자기뿐 아니라 차(茶)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라고 응급하면서, 그 증거로 『통도사지』에 ‘통도사가 646년(신라 제 27대 선덕여왕 15)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서 창건되었는데, 그보다 앞선 643년 자장율사가 차 씨를 뿌리고, 몇 년 뒤 동을산 다솔천에서 차를 거두었다.’ ‘동을산은 영축산, 다솔천은 지산리로 보고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곳 지산마을이 하동보다도 먼저 차를 재배한 곳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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