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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의 근본을 가르쳐 주셨던 할아버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B030206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지산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엄원대

지산마을에 사는 최원봉(95) 옹(2008년 작고)은 1973년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34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모님의 산소를 찾아 길을 나섰다. 통도사 산문을 비껴난 길을 따라 30분 가량 걸어 도착한 야산이 최옹의 부모와 아내가 묻혀 있는 곳이다.

최옹은 "가고 오지 않는 게 세월이고, 다시 볼 수 없는 게 부모"라며 능숙한 손놀림으로 묘소의 잡초를 뽑아냈다.

2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환갑을 넘길 무렵 부친상을 당한 이후 최옹은 하루도 빠짐없이 제를 올리고 묘소에 들러 안부를 여쭙는다. 최근에는 근력이 떨어져 하루 한두 번 정도에 그치고 있지만 그래도 "하루 세 끼 제에 맞춰 묘소를 세 번 찾는 게 원칙"이라고 말씀하셨다.

울산시 울주군 삼남면에서 태어나 6·25전쟁 직후 양산에 정착한 최옹은 "그 당시 부모님과 떨어져 지낼 수 없어서 셋방 하나를 얻은 뒤 부모님과 아내, 자식들과 한 방에서 지냈을 때가 그립다."며 "선친께서는 살아생전 겉으로 표현은 안하셨지만 늘 자식들 생각이 먼저였는 기라."고 회상했다.

최옹은 전쟁 당시 울주군 삼남면 경비대장을 맡았고 좌·우익 갈등이 첨예해질 무렵 좌익들에 의해 집이 몽땅 불타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옹의 아버지는 혈기 넘치는 아들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지만 끝내 이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정착한 곳이 양산 하북면 단칸방이었던 것이다.

최옹의 아내에 대한 그리움도 각별하다. 최옹은 "젊어서 술도 많이 마셨지. 그런데 할멈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딱 끊어뿌따. 그런데 이렇게 매일 찾아와도 한 번도 아는 척하지 않으니 많이 토라지긴 했나보다."라며 아내의 봉분을 만지작거렸다.

최옹의 조상에 대한 애틋함은 성묘뿐 아니다. 생일상을 받을 때도, 예식을 치를 때도 늘 조상에 제를 먼저 올리고 절을 받는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명절 때면 최옹의 집은 후손들로 넘쳐난다.

"가족들 다 모이면 150명 정도가 되는데 명절 때 성묘 길에 나서면 길이 꽉 막혀버릴 정도"라며 후손들의 번성에 대해 흐뭇해했다. 최옹의 자녀 2남 1녀가 모두 손자며느리까지 봤고, 최옹의 동생이 각각 7남매씩 자녀를 둔 덕에 너른 최옹 집 마당은 명절 때마다 왁자지껄해진다. 최옹이 들려주는 가족사 가운데 특이한 것은 3대가 동갑내기와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다. 최옹은 "부모님도 동갑내기, 나도 아내와 동갑, 큰아들과 작은딸 내외 모두 동갑내기"라며 활짝 웃었다.

근년에는 최옹의 건강을 염려한 자녀들이 묘소 옆에 조그만 컨테이너 박스를 설치했다. 아무리 말려도 중단되지 않는 성묘길이라 잠시나마 부친이 쉴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최옹은 이날 부모의 묘소 앞에서 "올해(2007) 벌초는 손자가 했는데 낫질이 억수로 훌륭했다."며 반백이 된 손자 자랑을 한 뒤 아쉬운 듯 산을 내려갔다(국제신문, 2007. 9. 22 기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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