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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소통하는 시명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D010107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명동 명동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기혁

한창 먼지를 풀풀 날리며 공사가 진행 중인 화성 파크드림 아파트 건설 현장. 이렇게 명동마을에도 점점 도시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아파트 건설현장을 지나면 산으로 오르는 작은 샛길이 하나 보인다. 마치 도시에서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통로 같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길은 바로 시명골로 가는 입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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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명골 입구

샛길 입구에는 시명사, 청룡사, 기원정사, 시명골 쉼터 등 각각의 표지판들이 저마다 이리 오라며 손짓하고 있다.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를 따라 한걸음씩 발길을 옮기다보면, 도시의 풍경은 저 멀리 등 뒤로 시야에서 사라진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길을 걷다 보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명곡 소류지가 나타난다. 소류지의 경치에 감탄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흙길로 변해버린 도로를 걷고 있다. 소류지로 올라가는 길은 비교적 넓어 차량을 이용하면 불편함이 없지만, 소류지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싶다면 자연과 하나 되어 걸어가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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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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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곡 소류지

소류지의 경치에 마음이 홀린 채,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는 소류지의 정경을 떠올리며 걸어가다 보면 한참이 걸리는 시명골에도 금세 도착하게 된다. 마침내 아직 오염되지 않은, 1급수의 수질을 자랑하는 시명골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은 오래 전부터 마을사람들의 한 여름철 더위를 식혀주는 쉼터이자 놀이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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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명골

이 계곡에는 골짜기마다 이름을 달리 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마을 이장님께서 말씀해주셨다. “시명골 저 안으로 드가면 저수지가 있고, 골짜기를 보믄 바위들이 억수로 많습니더. 그 바위들 중에 특이하게 생긴 바위들에는 입 벌린 바위, 병풍바위, 큰 바위, 토끼 바위, 알 놓는 바위 등등 해가꼬 억수로 재미있는 이름들이 많습니더. 우리 마을에는 골짜기 수가 싹다 해가꼬 100개가 되는데, 100개 골짜기 중에 99개 골짜기에서는 물이 나오고, 딱 한 개 골짜기에서만 물이 없습니더. 그래가꼬 물이 없는 골짜기를 물이 없다꼬 해서 ‘물 없는 골’이라고 합니더. 각각 바위 이름이 그기 있는 장소나 특징에 맞춰가 지어졌습니더. 베틀바위를 지나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믄 거기에 ‘장난골’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옛날 거기에서 범(호랑이)이 장난을 치고 놀았다고 해가 ‘장난골’이라고 합니더. 또 ‘송골’이라고 하는 곳도 있는데, 거는 들어가는 입구가 송곳처럼 뾰족하게 생겨가꼬 올라 갈수록 송곳처럼 끝이 뾰족하고 들어갈수록 넓어지고 그래 생기가꼬 ‘송골’이라 합니더. 여기 ‘등잔골’이라고 하는 곳은 옛날에 한 100년 전까지도 그 산에서 닭이 울었었는데, 새벽에 닭이 울면 사람들이 이제 그때사 불 켜고 그라믄서 날이 샜다고 해가 ‘등잔골’이라고 지었습니더.”(이자무, 명동마을 이장, 62세)

시명골에 앉아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옛날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서 여름을 즐기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이제는 아파트 단지들이 곳곳에 건설되면서 마을의 모습도 변하고 있지만, 그 너머 아직 오염되지 않고 한 여름의 시원한 물이 우리를 반겨주는 시명골이 있다.

시명골 베틀바위에 얽힌 전설 이야기

시명골 을 찾아 가는 길에서 이 마을주민인 이옥순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잠시 쉬어라도 갈 겸 할머니와 함께 잠시 시명골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잔잔한 목소리로 자신이 어렸을 적 들었다는 지명에 대한 전설을 들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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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명골

“저기 보이나? 저 골짝으로 들어가면 ‘베틀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는기라. 저 앞에 나무가 억수로 크고, 잎도 나고 하니까 지금은 바위가 잘 안 비는데, 옛날에는 뭐 기름도 없고 보일러 나오기 전이라서 땔감을 나무 잘라서 하니까 여기 나무도 많이 베어서 썼다고. 그래가꼬 입구서부터 보면 바위가 덩그러니 나타났는데, 요새는 숲속에 묻혀가꼬 잘 안비. 근데 그 안에 바위가 억수로 큰 게 있다. 이 바위에 대한 전설도 있고, 이 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억수로 많아서 다 들을라 치면 하루 가지고도 택도 없을 기다.”라며 할머니께서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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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틀바위

결국 시명골로 가는 발걸음을 잠시 멈춘 채 길바닥에 주저앉자, 할머니께서는 너털웃음을 지으시며 이야기를 계속하셨다.

“옛날 옛적에 명곡마을에 금술이 억수로 좋은 한 부부가 길쌈을 해가 베를 짜서 밥벌이로 하고 살고 있었다. 그 집에는 자식은 음꼬 개를 한 마리 키우고 살고 있었다드라. 어느 날 임진왜란이 일어나가꼬 마을 사람들이 산속으로 피난을 갔는데, 베틀 부부 두 사람은 베틀이 자기 밥줄이니까 그거를 걷어가꼬 지게에 지고 가재도구를 챙겨가 강아지를 데리고 시명골 저수지 저짝 안 골짝 깊숙이로 피난을 간기라. 거기 가보니까 큰 바위가 있고 그 밑에서 살 만한 자리를 발견해가꼬, 가재를 정리하고 베틀을 손질하고 해가 거기서 베틀을 짜고 살게 된 기라. 근데 왜적들이 대운산을 수색하면서 시명골을 수색하기 시작했는데 글쎄 그 요망한 강아지가 사람소리를 듣고 막 짖어뿐기라. 강아지 소리를 듣고 찾아온 왜적들은 두 부부를 묶어가꼬 포로로 잡아가뿌찌. 왜란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은 다들 마을로 돌아왔는데 결국 베틀 부부는 못돌아왔다카데. 그 뒤 수소문해서 알아보니까 베틀 부부는 포로가 되가 잡혀가꼬, 시명골 바위 아래 베를 짜던 베틀하고 강아지가 같이 죽어 있었다고 전해고 있는기라. 그래서 그 바위를 ‘베틀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할머니, 그라모 시명골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꺼?”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왜 없겠노? 그라모 시명골에 대한 이야기도 쪼매 들려주꾸마.”하시며 이야기를 줄줄이 이어나가셨다.

시명골(時鳴谷)은 저 짝에 동쪽 대운산에서 뻗어 내린 장난골, 이응골에서부터 물이 시작해가 깊은 계곡으로 흐르는데, 그 골짜기의 물이 억수로 맑고 깨끗해가꼬 마을에 젖줄이라고도 했었는기라. 그 시명골명동 예전 이름인 명곡 지명 유래라고도 하데. 시명골에 시명(時鳴)이란 지명은 먼 옛날 시명사(時鳴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 이름에서 나왔다카데. 이 절이 생기기 전에 절터에서 신기하게 닭도 없는데 가끔 닭 우는 소리가 들렸는기라. 그래서 시명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하데. 시명골에는 시명사하고 아까 말했던 베틀바위도 있고 그렇다. 시명사는 명곡마을에서 동쪽으로 시명저수지 위로 난 도로를 따라가다 보믄 나온다. 어르신들은 그 절이 신라 때 지어졌고, 절이 있었던 흔적이 있는 터에 1900년경 동래정씨 덕호 부인하고 경주최씨의 부인 정호화 보살이 지었다고 그래 말하드라. 정호화 보살은 부잣집 맏며느리로 부족함이 없는 집안이었는데, 고마 세 딸을 낳고 아들을 못 낳아가꼬 애를 태우고 있었는기라. 그때는 아들이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아이가. 시가집에서는 노골적으로 막 구박을 해가꼬 그 구박이 너무 심해서 삶에 회의까지 느끼면서 살았는 기라. 생각해봐라. 지 처지를 생각하니까 부귀영화도 한 점의 구름처럼 안 느껴지겠나. 이거를 깨닫고는 고마 시명골에 시명사를 지었다고 하데. 그런데 호화보살이 금강산에 새로운 절을 짓기 위해가꼬 땅을 마련하고 모든 준비를 마친 뒤에 시명사의 대문을 나갈라꼬 하는 순간, 갑자기 쓰러져가꼬 혼수상태가 됐는데 며칠 후에 안정을 되찾아가꼬 지 몸을 움직여서 일어나 볼라꼬 했어. 근데 일어서지지가 않는 기라. 그 이후로 호화보살은 앉은뱅이가 되가꼬 일생동안 시명사 안방에서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하데. 시명사 대웅전에는 원래 스님이 없는데도 가끔 목탁소리가 들려온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호화보살의 목탁 소리라고 전해지고 있기도 하고. 정호화 보살의 딸이 백연화 보살인데 그 딸은 안씨 댁에 시집을 가가꼬 아들을 낳고 잘 살았는데 남편이 나병환로 고생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는 기라. 남편 보내고 살아가기가 막막해가 백연화 보살은 신씨 댁으로 재혼을 해가꼬 아들 둘, 딸 하나를 낳고 부족함이 없이 잘 살았거든, 그런데 두 번째 남편인 신씨도 세상을 떠났뿐 기라. 그래가 운명이 억수로 기구하다 싶은데도 어디 한 군데 하소연 할 때도 없고 마음에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는 기라. 사람이 태어나가꼬 한평생을 보내면서 살고 죽는 것이 한 순간이고 운명과 부귀영화 같은 그 귀천도 다 한 순간 아침이슬같이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고, 뜬구름같이 흘러가는 지 모습을 바라보믄서 유산으로 받아논 논 50마지기를 어머니 호화보살이 이루어놓은 시명사에 바치고, 시명사 주지가 됐는기라. 그거 말고도 시명사 칠성각 옆에 모신 약사여래불에 대한 이야기도 하나 있다. 호화보살이 대웅전을 짓고 있을 때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는데 백발노인이 나타나가꼬 ‘내가 바위 밑에 누워있다. 나를 일으켜 세워다오.’라고 하는 꿈을 꾼 기라. 그 이튿날 그 바위 밑을 파보니까 지금의 약사여래불이 묻혀 있는 기라. 이거를 꺼내가꼬 정성을 다해서 자리를 깔고 바로 세워가꼬 오늘의 약사여래불이 되어 오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할매가 알기로는 이 여래불은 신라시대 말에서 고려시대 초에 건립된 기라고 알고 있다. 근데 그 앞에 큰 전나무 한 그루가 있거든 그거는 명동리 박완수의 조부 박시용 씨가 심었다고 하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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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명사(時鳴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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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여래불

“이야, 관련된 이야기가 억수로 많네요.”

“그렇제? 내가 망구할매가 되가꼬 두서도 없이 막 이야기 했다. 옛날이야기가 다 그렇지 뭐. 맞다 아니가? 고마 별에 별 이야기가 다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그만큼 마 신기한 곳이라 카드라, 그 정도만 알고 있어라.”(이옥순, 명동마을 농민, 72세)

그 옛날 전설이 현실이었던 그 때에도 시명골에 물은 이렇게 아름답게 흘렀으리라. 잠시 쉬어가는 길목에서 할머니께 들은 이야기는 마치 그 세월을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보고 온 듯한 기분이 들었던 시간이었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 전설을 들려주신 할머니께 감사드리며 마을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를 앞으로도 오래오래 사시면서 들려주실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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