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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전기에 얽힌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D010204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명동 명동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종봉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 마을사람들에게는 전깃불에 얽힌 기억이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이 마을은 1960년 초까지만 해도 호롱불에 의해 방안의 어둠을 부분에만 밝혔다. 어두운 호롱불 밑에서 길쌈을 하고, 베를 짜고,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고, 가마니를 치고, 멍석(등시기), 봉태기, 바지게, 소쿠리, 우장(우의)를 매고, 생활 요구를 만드는 등 밤에 이루어진 모든 일은 호롱불 밑에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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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밤새 책을 보거나 글을 쓰고 나면 그을음이 콧구멍으로 들어가서 코를 풀면 콧물이 새까맣게 나왔다. 호롱불 앞에서 졸음을 견디지 못해 졸다 머리가 호롱불에 닿아 노랗게 끄슬러 먹는 일도 많았다. 마을에 전기가 부분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60년이 다 되어서였다.

1959년 11월 15일, 명곡 농업협동조합(조합장 이석순)에서 7호 국도 명곡교량 동남쪽 회야천 변에 인접한 주진리 김수백 소유 물레방아를 72만원에 매수하여 회야천을 이용한 소형 수력 발전소를 건설하였다. 사업자금과 운영자금은 농업은행으로부터 1959년 11월 10일에 140만원을 빌렸다. 3KW 발전기 1기를 설치한 뒤 전주를 세우고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 146개를 달아 전기 사용료로 시설 빌린 돈을 갚아나기로 하였다.

1960년 3월 14일(조합장 박건중) 물레방아를 터빈으로 개조 건설하여 전등 100V 13W 200등을 설치하였다. 낮에는 도정공장을 돌리고 밤에는 마을에 전기를 공급했다. 외홈마을에는 전선 공사비가 많이 들어 전기 공급을 하지 못했다. 전깃불 공급은 초저녁 어둠이 깔릴 때부터 밤 11시경까지로 제한하였다. 전등 한 등 밝기는 양초 2개 정도[2촉]의 밝기였다. 비가 많이 내리는 시기에는 터빈을 돌리는 물이 많아 불이 더 밝았고, 가물어 물이 적을 때는 어두웠다.

재료도 부실하고 전문가가 아닌 주민들이 한 전기공사가 되어 전기 줄에서도 고장이 자주 발생하고, 집안에서도 고장이 잦았다. 전기 수리는 마을 사람인 박희수·박장식이 맡아했다. 전기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많다. 마을 사람 가운데 이름이 이두수는 전기를 돌본다는 일념으로 발전기에 자주 손을 대었는데, 전등을 깜박이게 하거나 고장을 자주 내게 하였다.

전등만 깜박이면 이씨의 소행으로 알고 마을 사람들은 “두수, 두수다.”한 적도 있었다. 모든 자원이 부족했던 때라 밤사이 한적한 곳에 설치되어 있는 전선을 도둑이 자주 걷어가곤 했다. 늦은 가을쯤에는 터빈이 돌아가지 않아 물을 빼고 터빈 속을 보면, 회야천에서 떠내려 온 게가 터빈 구멍에 20~30마리씩 끼어 터빈을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터빈 하수구 청소를 하기 위하여 물을 빼고 도랑을 칠 때는 뱀장어, 탱고리, 참지름쟁이 등의 고기가 엄청 잡혔다. 전기 한 등당 연간 사용료로 벼 1말 정도를 받아 경비로 충당했다.

전기를 아껴 쓰기 위해 방과 방 사이의 바람벽에 구멍을 내어 전기 한 등으로 두 방을 밝히기도 했다. 마을에 전기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974년이다. 1972년 경에 덕계부터 서창까지 전기가 들어왔고, 2년 정도 지나서 웅상과 명동리에도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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