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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배고팠던 기억 ; 장이쌀 제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D010205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명동 명동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종봉

장이쌀 제도라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단어이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8월에 추수하고 다음해에 봄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배고픔에 시달리는 시절을 보내야만 하였다. 일명 보리고개라는 것이다. 가을 벼농사가 끝이 나면 보리를 심는다. 이듬해 4월쯤에는 장독에 쌀이 동이 났어도 보리를 수확하기까지는 한 달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 곳간에는 먹을 것이 거의 떨어졌다. 아이들이 제일 배고플 때이다. 이 시기가 우리 농민들이 한 해 중 제일 어려울 때였다. 바로 장이쌀이란 이 때 등장하는 제도이다. 식량이나 가계 자금이 떨어진 가정에서 여유 있는 집이나 계(契)에서 쌀을 빌려와 사용하고, 이자를 더하여 그해 연말에 갚아주는 일종의 거래였다.

장이쌀 제도가 시행될 당시의 이자는 지금의 상상을 초월한 정도이다. 점점 낮아졌지만 1950년경 100%, 1960년경 50~70%, 1970년경 30%, 1973년경 20%, 1975년경 15%였다가 1980년경에 이 제도가 없어졌다. 이렇다보니 장이쌀 제도는 쌀을 빌리지 않으면 굶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두 번 울리는 무서운 제도였다. 빌려서 사용하는 기간이 1년이든 한 달이든 1년 치 이자를 물어야 했다. 보리쌀을 빌리고 같은 양의 쌀로 갚았다(당시 보리쌀 2되 가격이 쌀 1되 가격임). 변질된 쌀을 빌리고도 꼭 성한 쌀로 갚았다.

비싼 장이쌀 이자에 시달리는 가난한 가정의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할 양으로 1965년경 명곡농업협동조합(조합장 박철수)은 식량이 부족한 조합원들에게 현물(벼, 보리)을 저축할 것을 권유하여 몇 해를 저축하여 모아진 곡식을 모아진 대로 싼 이자로 빌려줌으로써 장이쌀의 이용을 줄였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장이쌀 이자가 낮아진 것은 물론 인근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전국의 많은 조합에서도 이와 같은 사업을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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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곡농업협동조합

명곡농협은 전국 이동조합에서도 가장 많은 쌀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대략 그 양이 80㎏들이쌀을 400가마 정도였다. 그만큼 많은 쌀을 확보하여 농민들에게 싼 이자로 쌀을 빌려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이쌀 이자도 급격하게 떨어짐과 동시에 조합원들의 시름도 떨어져나갔다. 한 술 더 떠, 저축한 자금으로 부산에 농산물 직거래 공판장을 운영하려고 부지 물색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농협법 개정으로 이동조합이 해산, 읍면단위 조합으로 합병되는 과정에서 명곡농협은 1973년 11월 30일 웅상농협과 합병되었다.

그동안 조합원들이 저축한 원미와 이자 일부를 포함한 현물을 같은 해 조합원들에게 돌려주고 이자 수입 중 나머지는 회관 동쪽으로 도정공장을 이전하여 건립하는 경비로 사용하였다. 당시 명곡농협이 보유했던 쌀은 부산 서면 태화백화점 인근의 땅을 7000~10000㎡ 매입할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다. 그때 저축한 현물을 조합원들에게 배당하지 않고 새로운 법인을 설립하여 공익(명동 출신 부산 유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건립 등)을 위하여 투자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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