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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파괴된 성내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E010203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북부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종봉

일본은 조선을 강제를 점령한 이후 각 마을의 정신적 지주인 읍성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양산도 그러한 절차를 밟게 되었다. 1931년 양산읍성을 해체하고 읍성의 동헌 터에 일본식 건물인 양산군 청사를 건축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고유의 읍성 모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동헌 자리에 있었던 의춘당, 동헌 아문인 경성루(警省樓)와 서쪽 누각인 춘설루(春雪樓)는 이제는 저 먼 기억속에나마 있는 장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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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군 청사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양산군 청사는 해방이 된 이후에도 계속 그 자리에 있다가 1970년대에 비로소 지금의 양산시청 자리로 옮겨갔다. 일본은 동헌의 바로 아래쪽에 식민지배의 또 다른 산실인 경찰서를 신축하였다. 경찰서 자리에도 조선시대 읍성 내의 건축물이 있었을 가능성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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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양산경찰서 역시 1985년 현 양산경찰서 자리로 옮겨가지 이전까지 존재하였다. 양산경찰서는 현재 양산시립노인회관의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이 건물 내에는 양산장애인협회, 양산향토사연구회 등의 많은 단체들이 입주해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양산의 백성을 다스리던 읍성의 무대는 일제시기 식민지배의 중심으로 변화되어 식민시대의 산실로 자리매김했다. 일제강점기 양산군청과 경찰서의 건물 주위에는 또 다른 많은 관청의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향토문화사연구회의 정진화 님의 말씀에, “1920년도에 발행된 『북정원 고분군 발굴보고서』에 양산읍성의 반은 허물어지고 반은 있다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읍성의 일부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월 4일, 정진화 선생)고 하신 것으로 보아, 양산은 1931년대 실시된 시구개정사업으로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읍성 내부의 마을 모습이 철저하게 훼손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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