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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경제의 반석, 읍내의 천석 부자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E020102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향토사연구회

밀양부터 불어나기 시작한 낙동강이 합천 황강 쪽에서 흘러오는 또 다른 줄기와 어우러진 삼량진부터 그 위용을 갖추니 여기서부터 물금까지 도도히 흘러내리는 모습은 차라리 장중한 교향악 같다고나 할까. 특히 낙동강 하구는 폭이 좁게 마감되어 그 흐름이 더욱 유장해 보이는데 어떤 풍수가는 그로 인해 영남에 인물이 많고 부자가 많이 난다고 한다.

강이 좁기 때문에 넘쳐흐르지 않고 보듬어, 세어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산에도 이러한 풍수에 걸맞게 천석의 부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천석의 부자라는 것은 한해 농사를 경작한 수확물이 천가마니(천석)에 이르는 사람을 말한다. 각 지역마다 천석의 부자들은 간혹 존재하였다. 양산지역에도 지금은 천석의 부자들이 사라졌지만, 일제 해방 직후 시기만 하여도 다수 존재하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배씨, 엄씨, 지씨 등의 가문이다. 양산에 거주하고 있는 지씨 가문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지영진(池榮璡)이다. 지영진은 지주적 기반으로 양산면장, 양산군수를 지냈고, 해방 이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양산군위원장, 1954년 제3대 민의원(무소속)에 당선되었고, 1958년 제4대 민의원(자유당)에도 당선되었다. 이후 국회 상공위원장을 역임한 양산의 대표적 부호이자 고위 관료였다. 그는 지주이면서 ‘대한도기주식회사’라는 기업을 경영하기도 하기도 하였다. 가히 천석 부자라 불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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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진(池榮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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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도기주식회사

지씨와 더불어 엄씨(영월)도 양산의 19·20세기에 중요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19세기 말 엄석규(嚴錫圭)[참판겸동지의금부사]·엄국영(嚴國永)[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은 부자관계로 당시 두 세대의 효열이라 부를 만큼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들은 고종대에 관인으로 활동하였다. 엄국영의 동생 엄신영은 기장군수를 역임한 이후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제시대는 엄주화·엄주태가 대표적 인물인데 대지주의 자제로서 1920년대 양산 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하였던 인물이었다.

그의 부친 엄우영은 구포저축주식회사(경남은행의 전신)의 주조로서 활동한 점을 고려할 때 경제적 기반은 상당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엄우영은 이원수공원 내에 1909년 그의 선정을 기념한 비가 세워졌으며, 엄주원도 같은 곳에 1914년 읍민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베푼 것에 대한 감사 표시의 비가 세워졌다. 따라서 엄씨는 이시기 지주적 기반으로 양산지역에 여러 가지 활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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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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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저축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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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원

양산의 천석 부자 중 배씨는 배성복·배태성 등을 들 수 있다. 일제시대 배성복은 사용(司勇)을 지내기도 했던 배기진의 아들로서, 그의 지주적 기반으로 양산청년회로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양산청년회는 양산 지역 청년 및 대중들의 지덕체 배양과 더불어 경제적 문화적으로 실력 있는 인재양성을 위해 조직된 사회운동 단체이다. 배성복은 청년회 활동을 전개하면서 지주적 기반을 은근히 과시하였고, 이로 인해 당시 양산청년회 활동을 하고 있던 다른 인물들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양산의 지주들은 일제시기 지주적, 즉 지역 유지의 기반으로 청년회 활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다른 계층에 있던 인물들과 계급적 갈등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배태성도 양산 읍내에서 지주적 기반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아마도 배성복과 인연을 가진 인물로 유추된다. 양산의 지주들은 양산청년회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 지표로 청년회 결성 모임에서 당일 모은 의연금이 3,000여 원이었다는 것을 보면, 그들의 경제력이 상당한 규모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당시 그 정도의 의연금은 대단한 규모의 재정이라고 볼 수 있다.

양산읍성 내의 천석부자들은 그들의 역할 안에서 경제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도우며 활동하였다. 한 해 천가마니가 넘는 양을 수확하는 천석부자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힘들다. 모두가 돕고 손을 모을 때 그러한 수확도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이치처럼 경제적인 부를 얻은 사람도 결국엔 그들 혼자만의 힘은 아닐 것이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 마을에 사는 ‘마을 식구’이다. 앞으로도 모두, 마음이 천석부자인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이어져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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