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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을 연구한 양산의 젊은 예비 학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E030105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종락

장혜진(28) 씨는 경상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지리교육을 전공하고 2007년 8월, 「조선시대 양산의 읍치경관(邑治景觀) 연구」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 연구의 목적을 “양산 읍치경관의 복원을 통해 오랜 세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지극히 한국적인 도시조형의 원리를 이해하고, 양산 읍치의 역사지리학적 해석을 통해 조선시대 지방군현의 하나인 양산 읍치의 상징성과 구성상의 경관특징을 밝혀 빠른 도시화 과정에서 잊혀져가는 양산 지역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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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진(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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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산의 읍치경관(邑治景觀) 연구」논문

양산읍성 연구로 이어진 양산에 대한 애정

장혜진 씨는 1993년, 초등학교 6학년 되던 해에 어머니의 직장을 따라 양산으로 이사를 왔다. “부산에 살다가 양산을 접했을 때 너무 농촌스럽고 시골스럽고 해서 어린 마음에도 싫었어요. 양산초등학교 졸업 후 양산여자중학교양산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양산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고 말한다.

양산읍성에 관한 논문을 쓰게 된 동기는 무엇보다 양산에 거주하고 있으니 어느 지방보다 양산에 대해 잘 안다는 것과 지도교수의 연구 분야가 읍치이다 보니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막상 주제가 정해지고 연구를 시작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름대로 양산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양산에 대해 어떤 것을 할까 생각을 했어요. 많이 알려진 좋은 관광지가 있어서 관광 지리를 할 수도 있었는데 양산이 단기간에 많이 발전했잖아요. 양산으로 이사 오던 1993년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를 통틀어서도 단기간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도시이고 그런 과정에서 모교인 양산초등학교가 폐교 위기에 놓여있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서 ‘왜 양산의 중심지가 이렇게 낙후되어 가는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죠. 사람들이 계속 새로운 것, 세련된 것, 좋은 것만 찾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오히려 신라시대 9주 5소경 안에 양주라는 데가 중심지였잖아요. 그런 역사성을 찾는다면 양산에 대한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라며 젊은 학자답게 또박또박 논지를 펼치는 그에게서 참신함이 엿보인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이렇게 이어 간다. “양산은 살면 살수록 정이 가는 도시인 것 같아요. 부산에서 이사 온 저로서는 처음에는 삭막하고 기반시설이 부족하다보니 그런 것에서 안타까운 점이 많았는데, 일단 우리 한국화로 이야기하자면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복잡한 것보다는 오히려 지금 양산이 가지고 있는 조용하고 안락하면서 갖출 것을 차곡차곡 갖추어 가는 그런 모습이 저한테는 더 많이 와 닿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부산 친구들을 만나도 ‘양산 참 좋다.’고 이야기 하고 있거든요. 특히 여행이나 등산이나 많이 하다보면 양산만큼 경치가 좋은 곳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서도 자부심을 많이 가지고 있고요.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젊은 양산 사람에게서 남다른 애향심을 느껴진다.

이 밖에도 “각 시·도의 읍성 복원 사업의 진행을 보면서 한국적 도시조형 원리를 나름대로 연구하여 양산 읍치의 상징성과 구성상의 특징을 밝혀 잊혀져가는 양산의 정체성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고 싶었다.”고 한다.

▶ 발로 뛰어 완성한 논문, 「조선시대 양산의 읍치경관 연구」

장혜진 씨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지리학과를 택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지리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일단은 흥미가 있어야지 무슨 과목이든지 재미를 붙이잖아요. 제가 성격이 억수로 활발하거든요. 그런 성격하고 과목하고 궁합이 잘 맞았던 것 같구요. 지리를 배우면서 궁금증이 너무 많이 생긴 거예요. 의문이 생기는 것은 선생님께 질문을 많이 했죠. 그 때마다 선생님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는데 끊임없이 물어보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 같아서 지리책도 많이 봤죠. 지도 보는 게 너무너무 재미있더라구요. 굳이 내가 그곳을 가보지 않더라도 지도 안에는 그런 내용이 다 들어 있잖아요. 그런 거에 재미를 붙이면서 본격적으로 지리학과나 지리교육과를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죠.”라며 진로를 결정하게 된 동기를 얘기한다.

그가 연구한 내용에 의하면, “양산읍성의 위치는 양산시 중부동·북부동 일대로 양산의 도시화와 함께 허물어지고, 성의 일부 유적이 북부동 304-1번지, 중부동 170·173번지에 남아 있다. 성벽 둘레는 3,700척, 환산하면 약 1.2㎞로 조선시대의 읍성의 평균 규모보다 작은 크기였으나, 경상도의 평균보다 큰 편이었다.”고 한다. 그는 발품을 팔아 곳곳을 샅샅이 뒤지면서 그 흔적들을 찾아 직접 사진을 찍고 기록으로 남겼다. 본격적으로 연구한 기간은 1년 정도라고 한다.

양산초등학교 운동장 가로질러 성벽이 있었거든요. 지금도 큰 길 건물 옆에 성벽 흔적 약간 남아있고요. 곳곳에 돌아다니다보면 성벽이 허물어지면서 남은 돌로 담장 아랫단 기단 부분 담을 쌓아 놓은 곳이 있어요. 그런 것들은 충분히 복원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또 성벽 모양 그대로 골목으로 이용되고 있기도 하고요. 새로 생긴 도로는 직선화되고 넓어지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성벽이 있던 자리는 허물어지면서 바로 그 부분을 도로로 이용했고, 그 옆에는 신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일직선으로 만들 수 없어 좁지만 폭을 유지하면서 미로형 비슷하게 계속 굽으면서 길이 남아 있어요. 답사를 하면 약 30분 정도 걸리는데 그대로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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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초등학교를 가로지른 성벽

장혜진 씨는 “개발과 현대화에만 눈을 돌릴 것이 아니라 양산을 상징할 수 있는 문화재를 복원시키는 게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주위에서도 이런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면 좋겠어요. 완전한 복원은 어렵겠지만 대신 지형도에다가 표시해서 복원도를 만들어 요소요소에 세워둔다면 그 지점에 서서 현 위치가 이쯤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신도시가 막 크고 있는 상황에서 신도시가 현대식 도시라면 읍성은 과거 한국적 도시잖아요. 그 비교도 될 것 같구요.”라며 신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가는 구도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나름의 방안을 내 놓는다.

그는 이어서 “또 이곳 학생들이 사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저도 물론 외지에서 왔지만 양산의 초·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양산 토박이는 거의 10% 될까 말까 할 거예요. 그만큼 외지 사람들이 많다면 요즈음에는 고향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잖아요. 그러면 양산의 역사성이라든지 그런 것을 학생들부터 먼저 몸에 익힐 수 있도록 견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면 애향심도 생기고 좋을 것 같아요.”라며 읍성 주변을 사람들이 떠나는 곳이 아닌 찾는 공간으로 바꿀 수 있는 그 만의 해법을 제시한다. 깊이 생각해볼 만한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다.

장혜진 씨는 그의 연구를 통해 “양산읍성을 재고찰 해 본다면, 읍치는 조선시대 통치이념이 경관으로 각인되었고 국가 전체 통치방식, 중앙과 지방과의 관계 등 역사적 변화파악의 좋은 수단이며, 군사적 성격보다 행정적 성격이 높다.”고 했다.

“단순하게 읍성을 보면 돌을 쌓아놓은 정도밖에 안 될 텐데 그것에 대한 의미를 고찰해보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요. 읍성은 과거 촌락이 아니라 도시잖아요. 옛날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도시가 이렇게 만들어졌다거나 혹은 읍성 안에는 이런 이런 시설들이 있는데 그런 시설들이 어떠한 역할을 함으로써 양산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비쳐졌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고 말한다.

이어서, “읍성이 단순하게 군사적인 목적만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거든요. 읍성은 그야말로 행정중심지라는 시각적인 효과는 물론 군사적인 방어 역할도 했구요. 양산읍성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만들어 졌다고 추정하고 있는데요. 그 시기에 만들어진 읍성들이라면 아마도 조선시대 통치체제가 경관 속에 묻어났을 겁니다. 그런데 객사라든지 동헌을 보면 왕의 명령을 받들고 내려온 수령을 모시는 곳이잖아요. 그러면 일반 백성들이 왕을 볼 일은 없지만 왕과 거의 같은 대접을 했을 거고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동헌이나 객사는 그야말로 권위 있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어요.”라며 읍성에 대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말한다.

장혜진 씨의 양산읍성에 대한 연구가 순풍에 돛단배처럼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읍성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여기 계시는 양산 토박이 분들이 주로 양산읍성에 거주한 것이 아니라 양산 외곽에 농사짓던 분들이 많으세요. 그러니까 읍성에는 장을 보러 오는 분들이 많았지 읍성 공간 안에서 생활을 하거나 그런 분들이 적어서 읍성에 관해 이야기를 듣는 게 힘들었구요.”

자연적으로 옛 지도만으로 읍성이 있었던 자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양산이 다른 지역들처럼 읍성의 복원이 이루어졌더라면 쉬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아 골목골목을 누비며 읍성의 흔적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다른 지역을 보면, 서울뿐만 아니라 김해시도 거의 복원되어가고 있구요. 양산읍성이 일제강점기 때 무너졌다고 하는데 시기적으로 봐서는 충분히 복원시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어요.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겪으신 어르신들이 많이 계시잖아요. 그 읍성이 원래 존재했던 모습을 보신 분들이 분명이 있을 텐데 그런 분들이 연세가 더 드시기 전에 또 돌아가시기 전에 조금이라도 복원해 놓았더라면 오히려 양산의 이름난 통도사내원사, 빼어난 자연경관을 잘 알려진 곳 못지않은 좋은 관광지도 될 수 있을 거고, 살아있는 역사의 장소가 될 수 있을 텐데 하는 그런 생각이 많아 들었어요.”라며 아쉬움을 표한다.

이러한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의 연구에 양산향토사연구회 정진화 회장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정말 많은 도움 주셨어요. 연세가 지긋하신데도 열성이 대단하시더라고요. 오히려 제가 논문 쓴다고 찾아뵙고 하는 것이 죄송할 정도로요. 처음에는 지도교수님이 일제강점기 때 만든 지적원도를 주시더라고요. 출처를 여쭈어 보니까 양산에서 구하셨다는데 바로 정진화 회장님이 주신 거였어요. 그 지도를 보니 읍성 부분이 정확하게 표시가 되어 있었구요. 성은 ‘城’, 객사나 동헌과 같은 국유지는 ‘國’으로 농경지는 ‘田’으로 표시되어 있었어요. 이 지도가 없었으면 제가 논문을 못 썼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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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원도

지도 한 장이 논문을 쓰는 데 밤바다의 등대와 같은 존재였을 것 같다. “전화를 드렸죠. ‘찾아뵈어도 괜찮겠습니까?’하고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오라.’고 하셨어요. 염치불구하고 찾아뵈었죠. 귀한 그 지도를 또 주시려고 하셨어요. 나이도 어리고 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이인데도 구하기 힘든 자료를 서슴없이 주시려고 하고, 격려도 많이 해 주셨죠. 양산에 대한 사랑도 대단하시지만 본인이 못하는 부분을 누구든지 할 수 있도록 도움 주시려는 마음이 더 크신 것 같아요.”라며 힘이 되었던 때를 회상한다.

장혜진 씨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하여 먼저 지도를 통한 복원이 이루어지면 그 다음에는 상징적으로 성문 하나라도 만들어 놓는다든지 성벽의 흔적이라도 복원이 되었으면 좋겠단다. 그 때는 자신의 이 연구 결과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 양산을 제일 잘 아는 지리교사가 꿈

장혜진 씨는 이 연구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빠르게 변하는 양산 구도심의 모습을 잊어버리지 않게 사진에 담거나 글로 써서 단순한 과거에 대한 정리가 아니라 양산 역사의 한 부분으로 남을 수 있게 정리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가 모르고 있던 것을 시민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양산에 애정이 살아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는 양산읍성에 연구 후에 양산의 역사를 잘 알고 잘 보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인식과 함께 최근 들어 낙후된 구도심을 역사의 공간으로 충분히 활용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면서 “요즈음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많다고 해서 그 도시가 유명한 것이 아니라 역사가 깊고 지역민들이 공감하는 문화가 번창할 때 더욱 큰 도시가 되는 것 같아요. 뿌리가 깊은 도시가 된다고 해야 되겠죠.”라며 문화 도시가 진정한 도시라는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장혜진 씨는 이 연구를 하면서 막연한 의무감이 생겼다고 한다. “역사는 영속성을 지녀야 하는데, 그렇다면 저 같은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참여해서 해야 할 것 같아요. 큰 힘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양산 역사를 이어가는 데 한몫을 해야겠다는 각오가 생겼어요.” 그래서 얼마 전에는 양산향토사연구회에 가입했다.

그는 “양산의 역사를 이어가는 데 한몫 할 수 있는 양산토박이 지리교사, 어느 누구한테도 양산을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을 만큼 양산을 제일 잘 아는 지리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며, “언제나 저를 불러 주시면 기쁜 마음으로 제가 알고 있는 것을 같이 나눌 수 있는 그런 자리가 많이 마련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아울러 자신이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진로를 정했듯이 자신의 말 한마디가 아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나아가서는 장래에까지 영향을 준다면 보람이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먼 훗날 자신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일 것 같다고 한다.

장혜진 씨는 “사실은 연구 논문을 쓰고 나니까 의외로 여러 군데서 연락도 오기도 해서 ‘더 열심히 쓸 걸’하는 후회도 많이 남아요. 그런데 지도교수님이 이제 지리학자가 되겠다고 신고하는 신고식이지 네가 완벽한 지리학자가 되었다고 발표하는 게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대신 앞으로도 계속 연구하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그런 말씀을 듣고는 ‘아, 그래 한 번 했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어요. 물론 제 논문이 지금 봐도 부족한 부분이 많아요. 조금 보충해가는 식으로 계속 연구를 할까 생각중입니다.”라며 양산읍성에 관한 연구가 시작에 불과함을 암시한다. 젊은 지리학자이자 미래의 지리 교사인 장혜진 씨,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그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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