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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리 내력이 담긴 양산초등학교의 동창생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E030203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엄원대

북부동 175번지의 김영식(51) 씨는 이곳에서 42년 째 살고 있다. 그 옛날 양산읍성의 객사가 있었던 자리 뒤편이다. 출생지도 중부동이어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양산 구도심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이곳에 오기까지 두 곳을 거쳤지만 모두 반경 100m 이내의 가까운 거리이다. 김씨는 가락국 김해김씨 수로왕 후손으로 고조부 이전부터 대대로 양산 주변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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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51)

▶ 3대에 걸쳐 가족 5명이 양산초등학교 동창

김영식 씨는 양산초등학교 출신이다. 김씨의 아버지와 동생, 두 자녀 또한 같은 학교 출신이어서 3대의 가족 5명이 양산초등학교 동창이다. 그 뿐 아니다. 김씨의 숙부 4명과 사촌 형제, 조카들을 합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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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초등학교

“우리 가족 3대가 모두 동창이 된 것은 이곳 양산에서 뿌리내리고 오랜 세월 살아온 집안 내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나이쯤 되면 3대가 모두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데 대해 큰 자부심과 출신학교의 전통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어린 자식 세대에서는 별로 큰 의미를 인식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는 그의 말에 약간의 섭섭함이 배인 듯 하다.

양산초등학교는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졌다. 1911년 5월 1일, 양산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여 올해(2008년)로 97년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1970년 1월 31일에 지금의 자리로 옮긴 후, 1987년에 양주초등학교에 12학급, 이어 1994년에는 신기초등학교에 12학급을 분리하기도 했다. 2008년 2월까지 졸업횟수 94회, 졸업생 수는 1만 8천여 명에 이르는 양산의 대표적인 초등학교이다.

김씨에 따르면 양산초등학교는 우리 양산의 역사와 함께 했다고 한다. “어른들 말씀에는 일제강점기 때 학생군사훈련, 징용선발, 주민교육 등이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8·15 광복 직후에는 미국의 구호물자를 나누어 주는 곳이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특히 6·25 때는 징병차출, 의용군 모집, 휴전 직후 북한군 잔당 소탕본부, 의용군 훈련도 했다고 해요.” 그 후에는 베트남 파병, 반공연맹총궐기대회, 각종 선거유세를 비롯하여 최근에는 시민 체육행사, 양산 지역 선후배 체육행사 등의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고 한다.

▶ 어린 시절 푸른 꿈을 키우던 곳이자 마음껏 뛰어 놀던 곳

김영식 씨가 양산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는 지금의 자리가 아니었단다. 그가 4학년까지 다녔던 학교 자리는 지금 주택과 숙박시설이 들어 서 있다. “제가 1학년에 입학을 한 곳은 일제강점기 때 지은 건물이었죠. 본관 건물 맞은 편 정문 옆에 있는 건물에 교실이 있었는데 넓은 운동장에 플라타너스가 우람하게 서 있던 기억이 있습니다. 4학년 때는 본교 교실이 모자라 분교에서 공부하기도 했는데, 분교 자리는 얼마 전까지 예식장이었고 지금은 교회 복지시설로 바꼈더군요. 어른이 되고나니 그 곳이 바로 코앞이지만 그 때는 멀게 느껴졌죠. 골목길을 돌아 한참을 걸어야 했고 겨울에는 추위에 여름에는 더위에 시달렸던 기억이 납니다.”라며 어린 시절 기억을 떠 올린다.

그 뿐 아니다. 추운 겨울, 교실에 나무 난로를 땔 때도 있었단다. “지금은 교실마다 냉·난방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만 그 땐 없었다 아닙니까. 고사리 손으로 불을 지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힘겹게 붙인 난로 옆에 옹기종기 모인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추위를 녹이던 친구들의 새까만 얼굴이 기억에 선합니다.”라며 잠시 회상에 젖는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벌겋게 달아오른 난로 앞에 앉아 있다가 친구들이 뒤에서 장난삼아 등을 밀치는 바람에 난로에 엎어져 양손바닥과 턱을 불에 덴 적도 있었는데 그 일로 오랜 기간 아픔의 고통과 불편을 이겨 내야만 했단다.

김영식 씨가 5학년에 진학했을 때, 양산초등학교는 지금의 자리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요즈음 세대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우리는 많은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학교 앞 개울에서 모래를 퍼서 운동장 정지작업을 하거나 남은 공사에 쓸 자갈을 대야에 담아 나르는 작업도 했죠. 정말 하기 싫고 힘든 작업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른들의 무모한 발상이 아니었나 싶기도 한데 그 때는 어쩔 수 없었겠죠.”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도 새 학교의 새 책상은 마냥 좋기만 했단다.

꿈을 키우던 아름다운 시절, 그런 그에게 추억의 공간은 또 있다. “제가 어린 시절에 제일 기억에 남는 곳이 있다면 그 곳은 단연 당산나무일 겁니다. 그곳은 학교가 옮겨가기 전이나 새 학교로 옮긴 뒤나 중학교 다닐 때까지 항상 등하굣길에 있었고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온 최고령의 지킴이였죠. 나무 둘레는 긴 팔로 감아 몇 번을 돌아도 모자랄 만큼 굵은데 나무 중심에는 저희들이 통과할 정도의 큰 구멍이 뚫려 아래위로 통했습니다. 시커멓게 불에 탄 흔적도 있었는데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언젠가 벼락을 맞아 뿌리째 갈라졌고, 또 그 후에는 치성을 드리기 위해 켜 놓은 촛불이 중심부위에 옮겨 붙어 그렇게 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저희는 그것이 오히려 놀기에는 좋았죠. 밑으로 들어가 위로 나오고, 위에 올라가서는 가지타기를 하며 마냥 즐겁게 놀 수 있었기 때문이죠.”라며 할아버지 나무에 올라가서 재미있게 놀던 개구쟁이 시절을 떠 올린다. 추억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임에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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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나무

오뉴월부터 시작된 더위가 칠팔월 뙤약볕으로 익어 가면 항상 그곳에서 놀았다고 한다. 어른들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장기나 바둑을 즐기고, 아이들은 나무위에 매달려 더위를 식혔단다. 정말 포근하게 조건 없이 마냥 감싸주고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는 김씨의 추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아이들에게는 놀이터가 되어주고 어른들에게는 휴식처가 되었던 넉넉한 품을 가진 느티나무는 오랜 풍상을 견디며 지금도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 있다. 문화원 뒤편에 가면수령 780살의 도지정 보호수인 그 나무를 만날 수 있는데 10여m나 되는 큰 키에 나무둘레는 7.3m나 된다.

김영식 씨의 어린 시절 놀이터는 또 있다. 실습지로 알려진 느티나무 근처 포도나무가 심어져 있던 밭은 동네 아이들의 전쟁놀이를 하는 전투지로 유명했단다. “이 동네, 저 동네 장난꾸러기 악동들은 수업이 끝난 후나 휴일이 되면 어김없이 그곳에서 전쟁놀이를 했죠. 긴 대나무를 꺾어서 만든 칼을 들고는 무협지 만화에 나오는 무사 흉내를 내면서 이리저리 뛰어 다니고요. 그런 추억 하나 쯤은 다 있을 겁니다. 그때는 모두가 주인공이었으니까요. 어떤 때는 산적이 되어 쫓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군인이 되어 쫓아가기도 했죠.”

뿐만 아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불 깡통 돌리기와 달집태우기는 악동들만의 연례행사로 매년 어김없이 이어졌단다. 어른들은 불장난한다고 나무랐지만 아이들에게는 마냥 즐거운 가장 중요한 그들만의 놀이 문화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영식 씨가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을 때, 그 밭에서 큰 사고가 생겼단다. “추운 겨울날로 기억 되는데 동네 아이들이 불장난을 하다가 사고가 생겼어요. 보름날은 아닌듯한데 소문에 의하면 보름날 흉내를 내기 위해 모인 아이들이 불 깡통을 만들려고 주변을 뒤지다 깡통 크기 만한 쇳덩어리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두드리다가 폭발하고 말았죠. 그게 6·25 때 떨어진 포탄 덩어리였다고 합니다. 몇 명의 아이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급히 뛰어온 마을사람들이 병원으로 옮겨 다행히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마음과 몸의 상처는 그대로 긴 세월 안고 가야만 했죠. 우리 동네에서 그런 일이 생기니까 동네 사람 모두 침울해 있었습니다.”라며 시대의 아픔이 가져다 준 상처를 말한다.

중앙동사무소 앞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지 건물 하나가 있다. 한눈에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바로 공회당(公會堂)으로 쓰였던 건물이다. 오랜 기간 양산 지역의 많은 행사들이 이곳에서 열렸는데 김영식 씨도 그곳에 자주 간 적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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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당(公會堂)

“제가 5학년이 되었을 때 담임선생님께서 악대부를 해보라고 하셨어요. 그 때 작은북을 쳤죠. 악대부에 가입을 하고난 뒤 방과 후에는 매일 같이 연습을 했는데, 악대부 창설되고6개월 뒤부터는 양산지역의 각종 행사에 불려 다녔죠. 가장 많이 간 곳이 바로 공회당이었습니다. 행사를 마치면 대부분의 초청 단체에서는 사례조로 우리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는데 속에 버터가 들어간 ‘빠다빵’이었습니다. 굉장히 맛있었죠.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다. 지금이야 온갖 종류의 빵이 넘쳐 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빵은 쉽게 먹을 수 없었던 귀한 음식이었던 것 같다.

▶ 공동화 되어가는 구도심, 신입생 감소로 인한 양산초등학교의 어려움

양산은 한창 조성 중인 신도시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구도심은 급격하게 인구가 감소되고 있을 뿐 아니라 공동화(空洞化) 현상마저 초래하고 있다. 상권(商圈) 또한 신도시로 이동됨에 따라 주변 상인들은 활성화를 위하여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구도심에 위치한 양산초등학교 또한 그 여파로 입학생수가 급격히 줄어 폐교가 눈앞에 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학군조정을 통해서 학생을 유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는데 이를 지켜보는 김영식 씨의 마음 또한 착잡하다.

“언론에서는 신도시 개발과 아파트 건립 등에 따른 구도시의 공동화 현상이 가시화되고 있어 구도심지에 위치한 100년 전통의 양산초등학교의 입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보도가 났죠. 이대로 계속가면 몇 년 후에는 신입생이 거의 없어 신도시에 있는 초등학교의 분교로 전락하거나 폐교될 것이라는 한숨 섞인 이야기도 나오고 말입니다. 그런데 신도시에 최신식 학교가 생기니까 구도심권 학부모마저 위장전입까지 해 가면서 아이들을 그곳 학교로 보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라며 한숨을 쉰다.

지난 보도에 의하면, ‘지난 2000년 201명이 입학한 양산초등학교의 입학생이 해마다 줄어들어 2005년과 2006년에는 각각 112명과 82명으로 줄어들었고, 2007년에는 총 54명이 입학하기로 해 2개 학급도 채우지 못하게 됐다.’고 했는데, 실제 2년 연이어 2학급만 구성했다고 한다.

김영식 씨는 “이는 정부나 시가 신도시 개발에만 역점을 두고 편협된 개발계획을 세운 것의 결과물이다. 어떻게 하든 빠른 시일 내에 구도심의 회생을 이루어 내야만 한다. 이에 대해 교육청이 나서 학군조정을 해서라도 학생들을 유치해 100년의 전통이 있는 양산초등학교의 맥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도시 개발에 밀려 방치되다시피 한 구도심에 대하여 빠른 시일 내에 공동화에서 탈출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히 시청이나 경찰서, 등기소 같은 주요 관공서가 구도심에 남아 있기 망정이지 이들마저 신도시로 자리를 옮긴다면 구도심의 황폐화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다시 말해 신도시와 비등한 개발계획의 질적 개선이 없이는 땜질식 처방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100년 전통의 양산초등학교, 양산의 역사와 함께한 양산초등학교를 살리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민·관·학이 모두 합심 단결하여 상급기관과의 유대를 끌어내어 황폐해 가는 구도심의 자리를 되찾아 살려내야만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이어서 “지금이라도 재빨리 장기 계획을 점검하고 각종 주요기관이나 상업적, 공업적 기능을 비롯한 정치·문화·사회·경제·체육 등의 시설이나 역할을 그 특성에 따라 조화롭게 배분하여 배치하고 개발계획을 골고루 분산하여 한꺼번에 10마리 토끼를 잡기 보다는 중장기적으로 점진적으로 모두가 함께 나아질 수 있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개발이 이루어 져야 할 것”이라고 다시 역설한다.

태어나서 구도심을 떠나 본 적이 없는 김영식 씨. 이곳을 지키며 무너져가는 구도심과 신입생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교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그의 이러한 소망이 조금이나마 이루어져 신도시와 구도심이 상생하는 그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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