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8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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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正進會 筆禍事件 |
이칭/별칭 | 반독재 구국 선언문 사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정원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71년 4월 7일 - 정진회 필화사건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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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83년 - 정진회 필화사건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경북대학교 학생회관 - 대구광역시 북구 대학로 80[산격동 1370-1] |
종결 장소 | 대구지방법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동대구로 364[범어동 458-2] |
성격 | 학생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정진회|여정남|이현세|여석동|정만기|정욱표|권영기|전정효 |
[정의]
1971년 대구의 경북대학교에서 개최된 4월혁명 11주년 전국 대학생 써클 대항 학술 토론회에서 발표된 반독재 구국 선언문의 내용으로 일어난 사건.
[개설]
1971년 4월은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는 해였다. 경북대학교 이념서클 정진회와 여정남은 박정희 정권의 영구 집권을 저지하기 위하여 1971년 하반기에 경북대학교에서 개최학기로 계획되었던 전국 대학생 써클 대항 학술 토론회 일정을 당기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합의한 전국 11개 대학의 이념서클 소속 학생들이 1971년 4월 7일 경북대학교 학생회관에 모여 학술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 행사에서 정진회와 토론회에 참가한 서클 명의로 “범국민적 반독재 민주구국전선의 결성을 제의한다”는 등 5개 항목의 주장이 담긴 ‘반독재 구국 선언’을 채택하였다. 중앙정보부가 ‘반독재 구국 선언’의 내용을 문제 삼아 관련 학생들이 대거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정진회 필화사건이 일어난 1971년은 박정희 정권이 3선 대통령을 넘어 장기 집권을 기획하는 대선이 있는 해였다. 또 학생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교련 교육이 더욱 강화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였다. 경북대학교 이념서클 정진회는 이런 시국을 헤쳐나가기 위하여서는 학생운동의 전국 조직화를 위한 활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전국 조직화 활동의 일환으로 1971년 4월에 경북대학교에서 4·19혁명 11주년을 기념하여 전국 주요 대학의 서클이 참여하는 전국 대학생 서클 대항 학술 토론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토론회를 매개로 학생운동의 전국 조직화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계획이었다.
[경과]
「반독재 구국 선언」 작성에 관여한 여정남과 정진회 회원 이현세, 여석동, 정만기, 정욱표, 권영기, 전정효 등 7명을 대구 동촌에 있는 K-2 공군보안대로 연행하여 구타와 물고문, 전기고문 등의 고문을 가하였다. 학술대회 행사를 주최한 정진회는 경북대학교 본부로부터 서클 등록을 취소당하였다.
[결과]
정진회 필화사건은 관련자 7명이 군 보안대로 불법적으로 연행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구속·수감되었다. 1971년 8월에 7명이 보석으로 석방된 후 재판은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연기되었다가 1978년 1월에 다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반공법」 위반죄로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에서 1년, 자격정지 1년 6개월에서 1년을 선고받았다. 1983년 항소심에서 이현세, 여석동, 정만기는 징역 4개월과 자격정지 1년, 정욱표는 징역 6개월과 집행유예 1년 및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의의와 평가]
정진회 필화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5·16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후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에 나타난 여러 문제를 지적하고, 이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당면한 학생운동의 기본 방향이 반외세·반독재 민주화 투쟁임을 명확하게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