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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217
한자 徐憲俊
영어음역 Seo Heonju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강재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남도 양산군 웅상면 매곡리 442
성별
생년 1901년연표보기
몰년 1944년연표보기
본관 달성
대표경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원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서헌준(徐憲俊)은 1901년 10월 7일 경상남도 양산군 웅상면 매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일등 원종 훈신 서몽호를 선조로 둔 서헌준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났다.

[활동사항]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 때는 기회를 얻지 못하여 행동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운동이 뜻하는 바를 안 서헌준은 이로부터 구국 투지가 싹트게 되었다. 나라를 되찾고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민이 부의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고 보고 그 일 중 하나인 토목업에 종사하던 중 1932년 부산부의 온천교 건설을 일인에게서 하청 받아 많은 돈이 일시에 들어왔다.

상해 임시 정부 지하 공작원이 이 사실을 탐지하고 몰래 찾아와서 일본으로부터 취득한 이윤을 구국 자금에 쓰라는 권유를 받고 즉석에서 쾌히 응낙하였다. 그 후부터 임시 정부의 재정 원조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나중에는 그동안 장만한 농토 100여 두락마저 팔아 임시 정부에 보냈고 지방유지 김종호, 김종선 등으로부터 구국 성금을 모아 보낸 일도 있다.

서헌준은 1932년부터 국내에서 구국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의 감시에 신변에 위험을 느끼게 되면서 결국 1937년 상해에 망명하게 된다. 상해를 본거로 역시 임시 정부의 재정을 돕는 활동을 하였으며 1940년대 초 일본 국영 북지개발공사의 공사를 청부하면서 막대한 돈을 빼돌려 임시 정부에 헌납하였다.

이 사건으로 1943년 강동성에서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어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북지개발회사 피해금 6만 원을 변상하라는 판결문이 본적지 호주인 서헌준의 형 서희준에게 통고되었다. 통고서는 당시 뒷일이 두려워서 찢어 없앴다 한다.

그리고 서헌준이 1944년 3월 13일 오후 1시 5분 신의주부 미륵동 15번지의 2에서 사망했다는 사망 신고가 신의주형무소장으로부터 경상남도 양산군 웅상면 서헌준의 본적지 면 호적계에 같은 해 4월 5일 접수되었다고 한다. 서헌준에 대한 막중한 구국 공적도 남북이 통일 되어 당시 신의주지방법원의 재판 기록을 보지 않고서는 알 길이 없는 실정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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