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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033
한자 獨立運動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승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국권 회복을 위해 벌어진 운동.

[개설]

경상남도 양산 지역은 선각자들의 비밀결사운동 관련을 시작으로 1919년 3월 13일 하북면신평 의거, 3월 27일의 양산읍내 의거, 이후 1920년대의 청년운동·신간회운동·소년운동·부인회운동·근우회운동, 1930년대 전반기의 혁명적 농민운동, 1941년의 학생운동 등이 계속되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양산 지역의 독립운동은 해방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양산 3·1운동]

양산 3·1운동은 읍내보다 먼저 읍외 지역인 하북면 신평에서 3월 13일 시위가 먼저 일어났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후 부산과 동래의 3·1의거에 영향을 받아, 3월 27일에 읍내 쪽에서 시위가 발생하였다. 또 4월 1일과 5월 4일에 각각 읍내와 신평에서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이처럼 하나의 군(郡)에서 네 번의 3·1운동이 일어난 경우는 드물다. 양산 읍내보다 하북면 신평에서 먼저 시위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통도사에서 근대 학교를 일찍부터 운영한 것과 관련이 있다. 통도사에서 운영한 지방학림과 서울의 중앙학림 학생은 만해 한용운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양산청년회 결성]

다수의 희생자를 낸 3·1운동 이후 양산 지역에서는 1920년 7월 15일 양산청년회를 결성하였다. 양산청년회는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각종 토론회와 연극을 통해 농촌 계몽에 앞장섰다. 이때 양산청년회에서 다룬 주제들은 위생·교육·종교·남녀평등 등이었으며, 틈틈이 이웃한 지역의 청년 단체와 함께 체육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후 1923년 3월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초기 청년회는 주로 지역의 자산가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1923년 이후 전국에서 사회주의 이념이 확산되고 그 과정에서 사상 단체들이 출현하면서, 양산에서도 1925년 4월 무산계급의 이념을 표방한 신흥동우회가 조직되었다. 이후 양산청년회도 이념적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그 배경은 1927년 2월 서울에서 신간회가 결성되고 사회운동선상에서 전조선민족협동전선론이 강화된 데 있다. 이에 따라 양산청년회도 전민족적 청년운동을 목표로 1927년 10월 18일 양산청년동맹을 창립하였다.

[양산청년동맹 결성]

양산청년동맹은 결성 이후 경상남도 양산 지역 노동자·농민·여성·소년 등의 사회단체 역량 강화와 신간회 지회 설립 및 민중 문고 설치 등에 노력하였다. 이와 함께 1928년 8월 회원의 연령을 25세로 제한하여, 청년층을 중심으로 양산 지역 사회 운동의 핵심적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네 곳에 지부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들 젊은 청년층들은 소년동맹에 대한 지도를 비롯해 1929년 여름부터 신간회 양산지회에 적극 진출하여 신간회 양산지회를 이끌었다.

[신간회 양산지회 결성]

일제강점기 양산 지역 민족운동에서 중요 역할을 하였던 신간회 양산지회양산청년동맹의 노력 끝에 1928년 3월 19일 창립되었다. 신간회 양산지회는 창립 당일 지회 예산 750원을 회원들의 특별 회비로 충당하였는데, 여기에는 지주 출신의 민족운동가 다수가 지회 설립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양산지회는 여러 가지 사업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 협동조합운동을 중요시하였다. 이는 일찍부터 협동조합운동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김철수(金喆壽)의 영향 때문이었다. 양산지회는 1931년 4월 16일 신간회 해소 문제를 두고 논의한 끝에 당장의 양산지회 해소는 부결하였다. 그러나 이후 사회 운동의 중심이 양산농민조합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

[양산농민조합의 활동]

양산청년동맹신간회 양산지회의 오랜 노력 끝에 소작 농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양산농민조합이 1931년 4월 4일 결성되었다. 창립 당일 양산농민조합은 최고 소작료 제정 및 여러 공과금 지주 부담, 악질 지주 및 고리대금업자 철폐, 마름[舍音] 제정 철폐, 최저 일임(日賃) 제정, 소작권 확보, 협동조합 지지, 문맹 퇴치 등을 조합의 주요 사업으로 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1931년 10월 많은 농경지를 소유하고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지주들에게 통고문을 발송하였다. 그 내용은 소작료는 4할, 지세는 지주 부담, 종자예약(種子豫約) 철폐, 품종지정(品種指定) 철폐 등이었다. 이 통고문에 대해 양산경찰서는 농민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채고 농민조합 집행위원장과 소년동맹원 등을 검거하였다. 이들은 열흘이 지나 석방되었지만 소작인과 지주들 사이의 긴장은 더 고조되었다.

마침내 1932년 3월 소작인들은 농번기를 맞이하여 지주들에게 1931년 10월 요구했던 통고문의 내용을 재차 확인시키고 지주들의 횡포에 맞섰다. 이 과정에서 양산경찰서는 1932년 3월 15일과 16일 양일에 걸쳐 농민조합 간부들 16명을 검거하여 구류 처분을 내렸다. 경찰의 이런 조치에 농민조합원과 구류 처분을 받은 가족들 300명이 양산경찰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시위 군중 두 명이 경찰서의 진압에 의해 사망하고, 농민조합원 다수가 검거되었다.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은 당시 『동아일보』 사설에서 다룰 정도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1932년 3월부터 시작된 양산농민조합 사건으로 검거된 20명은 4월 7일 예심에 회부되어 17명은 형무소에 수용되고, 3명은 불구속, 나머지 70명은 전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로써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하였으나 농민조합의 핵심 인물이었던 전혁의 친척집에 숨겨둔 비밀 서류가 드러나면서, 조합의 중심 인물들은 재차 양산경찰서에 검거되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조합원의 핵심 인물들이 조선 공산당 재건운동 세력과 관련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이렇게 3·1운동 이후 계속된 양산 지역의 항일운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1941년 학생들에게 항일 의식을 가르친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관련된 통도중학사건으로 계승되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