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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235
한자 李圭麟
영어음역 Yi Gyuri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천면 석천리
성별
생년 1856년연표보기
몰년 1937년연표보기
대표경력 유림단 단원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이규린(李圭麟)은 1856년 아버지 이하찬(李夏燦)과 어머니 박용당(朴用堂)의 차남으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천면 석천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에 능통하여 유학자로 이름이 났다. 1927년 박수(朴銖)와 결혼하였으며, 1937년 양산시 주남동에서 타계하였다.

[활동사항]

이규린은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 등이 유림 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 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거사는 김복한을 중심으로 한 호서 유림과 곽종석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 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 유림은 김창숙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하였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 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이 체포되면서 발각되었다. 이로써 이규린도 일경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출옥 후에도 이규린은 항일 의식을 굳게 지키며 독립 운동의 방도를 모색하던 중 1926년 1월 경상북도 대구에서 김창숙의 밀명으로 경상북도 지역의 담당자로 파견된 정수기와 함께 무관학교 설립 비용과 내몽고 지방의 황무지 매입 등을 위해 필요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9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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