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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337
한자 金永浩
영어음역 Gim Yeongho
이칭/별칭 성보(聖甫),만취당(晩翠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진상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장
출신지 경상남도 양산
성별
생년 미상
몰년 미상
본관 김해(金海)
대표관직 병조판서

[정의]

조선 중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자(字)는 성보(聖甫), 호(號)는 만취당(晩翠堂).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의 후손이다. 아들로 수문장(守門將) 김을생(金乙生)과 부장(部將) 김의상(金義祥)을 두었다.

[활동사항]

김영호는 조선 중기 양산 지역 출신의 사람으로 임진왜란 당시 두 아들 김을생·김의상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선무원종(宣武原從) 1등공신이 되었다. 김영호가 김을생과 김의상 두 아들에게 말하기를, “태수[당시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께서 국난을 당하여 죽었다. 태수의 백성이 된 자가 어찌 임금에게 충성하고 윗사람 받드는 의로움을 모르겠는가!”라고 말하고 자신의 노비와 양산 일대의 장정들을 의병으로 불러 모으니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밤에 횃불을 들고 흩어져 다니면서 왜군이 지형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교란 작전을 펴면서 저항의 태세를 갖추니, 왜군이 감히 강을 넘어 김해 지역으로 진격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양산과 김해 지역 사이에서 적을 공격하여 왜군을 내포(內浦) 어령산(魚嶺山)으로 쫓아내었다고 한다. 이러한 김영호의 의병 활동은 왜군이 경상도 서부 내륙으로 진출하는 것을 어느 정도 지연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된다.

[저술 및 작품]

김영호의 저술로는 『만취당충효공양세삼충록(晩翠堂忠孝公兩世三忠錄)』이 있다.

[상훈과 추모]

1858년(철종 9)에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 兵曹判書)를 증직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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