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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553
한자 鄭好義
영어음역 Jeong Houi
이칭/별칭 시중(時仲),노산(魯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진상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장
출신지 경상남도 양산시
성별
생년 1557년연표보기
몰년 미상
본관 동래(東萊)

[정의]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시중(時仲), 호는 노산(魯山). 조선 전기 예조참의를 지낸 정절(鄭節)의 8세손이며, 의능참봉(義陵參奉) 정희란(鄭希鸞)의 둘째 아들이다.

[활동사항]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호의는 형 정호인(鄭好仁)과 안근(安瑾), 이몽란(李夢鸞), 최기(崔沂)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으며, 1592년(선조 25) 6월 5일 경주성으로 달려가 싸웠다. 이어 1592년(선조 25) 6월 9일 당시의 경주부윤(慶州府尹) 및 판관(判官) 등과 함께 짐승을 잡아 단심(丹心)을 표하는 징표로 피를 마시면서 여러 의병장과 더불어 「문천회맹록(蚊川會盟錄)」을 작성하였고, 경주성 방어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 후 고향인 양산 지역으로 돌아와 지역 방어에 힘쓰다가 1597년(선조 30) 7월 21일 곽재우의 의병군에 가담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는 등 경상도 일대에서 많은 전투를 치르며 의사(義士)로 존경 받았다. 임진왜란 후에는 후학 교육에 온 힘을 쏟다가 일생을 마쳤다.

[상훈과 추모]

1832년(순조 32)에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 있는 소노서원(小魯書院)에 입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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