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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사 제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3058
한자 龍岡祠題詠
영어의미역 Attaches a Subject, Poem Recite in Yonggangsa Shrin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성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한시
작가 박희영 외
창작연도/발표연도 1905년(고종 42)연표보기

[정의]

1905년(고종 42) 박희영 등이 울산박씨 사당인 용강사를 중건하면서 지은 칠언율시의 한시.

[개설]

「용강사 제영(龍岡祠 題詠)」이란 울산박씨의 사당인 용강사를 중건하면서 지은 시를 말한다. 용강사경상남도 양산시 용당동에 있는 사당으로, 1851년(철종 2)에 시조인 장무공 박윤웅(朴允雄)과 지한주사(知韓州事) 박추(朴諏)에 대한 제향(祭享)을 위해 건립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후 1905년(고종 42)에 중건하였으며, 1940년에 중수를 한 후 1973년에 다시 재중수를 하였다. 「용강사 제영」용강사 중건에 즈음하여 박희영이 지은 것이다. 최근 울산박씨 대종회에서 용강사와 관련된 자료를 모아 『용강사지(龍岡祠誌)』를 펴내었는데, 여기에는 박희영의 제영을 비롯한 많은 제영이 실려 있다.

[내용]

「용강사 제영」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칠언율시로 지어진 박희영의 시를 살펴보면, 수련(首聯)에서는 시조인 박윤웅의 충성과 공훈이 백세토록 드높다는 송찬으로 시작하였으며, 함련(頷聯)에서는 위수(渭水)에서 낚시질하다 주문왕(周文王)에게 등용되어 문왕의 스승이 된 강태공의 고사와 후한(後漢) 명제(明帝)가 전세(前世)의 공신들을 추념하고자 등우(鄧禹) 등 이십팔장(二十八將)의 초상(肖像)을 그려서 남궁(南宮) 안에 있던 운대(雲臺)에 걸어두었던 고사를 인용하여 시조인 박윤웅과 박추의 공덕을 송찬하였다.

경련(頸聯)에서는 한의 고조(高祖)가 공신들에게 황하가 허리띠처럼 좁아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작아지도록 공신의 집안을 영원히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던 이른바 대려지맹(帶礪之盟)의 고사에 빗대어 사당을 세웠던 당시 후손들의 맹세를 떠올리면서 그동안 제향이 끊어졌던 것에 대한 한스러움을 말하였다. 결련(結聯)에서는 사당을 중수하면서 후손들이 모여 다시 제향을 이어나가게 될 수 있게 된 감회와 다짐을 말하였다.

“우리 강토를 열어 우리나라에 바쳤으니/ 우리 시조의 충성과 공훈 백세에 드높도다/ 위수에서 낚시질함은 삼천년에 앞서 계책을 시험했고/ 운대에 걸린 공신 28인 가운데 공을 으뜸으로 칭했도다/ 영원히 공을 전하겠다는 맹세는 아직도 남아있건만/ 예는 제향(祭享)을 궐하였으니 한스러움 끝이 없도다(闢吾疆土奠吾東/ 吾祖忠勳百世隆/ 渭釣三千先試策 / 雲臺卄八首稱公/ 傳帶礪盟猶在/ 禮闕豆籩恨不窮/ 今日諸孫追慕地/ 英姿颯爽想遺風).”

[의의와 평가]

일제에 의한 식민지화가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고려의 건국 공신인 박윤웅을 추모하고자 사당의 중건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비록 가문의 시조를 기리는 사당 중건이라는 형태이기는 하지만, 인용한 고사의 성격으로 보아 시조의 충혼에 빗대어 후손들의 적극적인 애국심을 촉구한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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