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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대 제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3062
한자 講學臺題詠
영어의미역 Attaches a Subject, Poem Recite in Ganghakdae Pavilio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성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한시
작가 정인휘|이만도
창작연도/발표연도 조선 말기

[정의]

조선 말기 정인휘 등이 강학대의 자연 풍경을 감상하며 읊은 칠언절구의 한시.

[개설]

「강학대 제영」이란 경상남도 양산시 명곡동 입구 지역에 있는 강학대를 읊은 시를 가리킨다. 강학대는 건물이 아닌 바위로 사인암(舍人巖)이라고도 한다. 조선 말기의 인물인 정인휘(鄭寅暉)는 「사인암」이란 이름으로「강학대 제영」을 지은 뒤, 최황(崔滉)[1529~1603]이 노닐던 곳이라는 뜻으로 ‘최공황유상지소(崔公滉遊賞之所)’라고 주를 달았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서는 ‘양산군수인 이흡(李潝)이 강학대에서 돌아다니다가 그 바위에 이름을 붙여 사인(舍人)이라고 하였고, 그 개울에 이름을 붙여 학사(學士)라고 하고서 돌에 새겼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비슷한 내용이 『양산읍지(梁山邑誌)』의 「고적(古跡)」 ‘강학대(講學臺)’조와 『양산향교지(梁山鄕校誌)』에 실려 있다.

『양산읍지』에서는 ‘양산군수인 이여익(李汝翊)이 유생들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강학(講學)하였는데 천석(川石)이 깊고 아름답다. 그 후에 양산군수인 이흡이 응교(應敎)로서 외직에 보임을 받고 근무하면서 강학대에서 노닐며 완상하다가 그 바위에 이름을 붙여 사인이라고 하였고, 그 개울에 이름을 붙여 학사라고 하고서 돌에 새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여익의 재임 기간은 1644년(인조 22)부터 1649년(인조 27)까지이고, 이흡의 재임 기간은 1733년(영조 9) 한 해 동안이었다.

강학대최황의 사환기(仕宦期)인 16세기 후반 이후에 양산 일대의 대표적인 유상지소(遊賞之所)로 자리 잡았는데, 이여익이 이곳에서 유생들을 이끌고 강학한 후로 강학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이흡이 사인암이라 부르면서 강학대와 함께 사인암이라는 이름도 함께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양산읍지(梁山邑誌)』를 쓴 이만도(李晩燾)[1842~1910]는「지보(識補)」에서 ‘군수 이만도가 사인암에 기문을 썼다.’라고 하였고, 「유사인암(遊舍人巖)」이라는 「강학대 제영」을 남겼다.

[내용]

대표적인 정인휘의 「사인암」을 살펴보면, 기구(起句)에서 작자인 정인휘는 사인암이 양산 지역에서 가장 풍치 좋은 곳이라고 하였고, 승구(承句)에서는 깎아지른 듯 우뚝 서 있는 사인암에 꽃잎이 나풀거리는 모습을 읊었다. 전구(轉句)에서 백세(百世)의 고풍이라 한 것은 양산군수로 재임하면서 사인암에서 강학하기도 하고 노닐기도 했던 이여익과 이흡을 가리킨 것이다.

결구(結句)의 청삼(靑衫)이란 낮은 벼슬아치들이 입는 관복을 말하는 것으로 미관말직을 뜻한다. 정인휘는 1905년(고종 42)에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썼는데, 청삼은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처럼 쓰이기도 하므로 강학대에 올라 절경에 취한 자신을 뜻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의춘(양산)에서 태깔 나는 것은 사인암이니/ 꽃이슬이 길게 드리워 저 절벽에서 끊어지네/ 백세의 고풍은 마땅히 경앙(景仰)할 일이니/ 이곳에 올라 종일토록 머물며 떠나지 못하네(宜春生色舍人巖/ 花露㲯毿截彼巉/ 百世高風宜景仰/ 登臨竟日攝靑衫).”

[특징]

「강학대 제영」은 건물이 아닌 강학대 또는 사인암이라 부르는 자연물을 대상으로 한 제영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대개의 제영이 칠언율시 형식을 취한 것과 달리, 특정 지역의 경물이나 풍속을 읊는 죽지사(竹枝祠)계 한시와 마찬가지로 칠언절구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강학대는 양산 지역을 대표하는 경치인 양산팔경에는 들지 못하지만, 조선 중기의 인물인 최황이 노닐던 곳으로 알려져 왔다. 또한, 17세기 중엽과 18세기 전반에 양산군수를 지낸 이여익과 이흡이 강학대와 얽힌 이야기를 남기는 등 양산의 대표적인 절경 중 하나였다. 정인휘의 「강학대 제영」을 통해 강학대가 수백 년 동안 양산의 대표적인 유상지소였음을 알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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