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035
한자 壬辰倭亂
영어의미역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종봉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쟁
발생(시작)연도/일시 1592년 4월 13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598년 12월연표보기
발생(시작) 장소 부산진성
관련인물/단체 백수회(白受繪)|김영호(金永浩)|정호인(鄭好仁)|정호의(鄭好義)|안근(安瑾)|최흥국(崔興國)|유정(柳汀)|이수생(李秀生)|이몽란(李夢鸞)|이구(李鳩)|방익(房翼)|윤옥(尹沃)|윤발(尹潑)

[정의]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

[개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의 전쟁이다. 제1차 침략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략이 정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하는데, 이를 통칭하여 임진왜란이라 한다. 이를 일본에서는 ‘문록(文祿)·경장(慶長)의 역’이라고 칭한다.

[역사적 배경]

조선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정쟁 등으로 중앙 정치의 모순이 나타났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계가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서 100여 년간의 전국시대가 종결되어 통일 국가가 수립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봉건 영주들의 군사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대륙 침략을 모색하였다.

[목적]

임진왜란의 목적은 무역 전쟁의 시각과 문화 전쟁의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은 포르투갈의 무역을 통해 16세기에 축적된 상업 자본을 바탕으로 성장한 다이묘 세력들이 동아시아 무역 특히 중국과의 직교역 체제를 확보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 볼 수 있다. 또 당시 낙후해 있던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조선을 침략 대상으로 삼았다는 견해도 있다. 즉 조선의 앞선 성리학 이론과 활자 기술과 도자기 기술 등 과학 기술 문화를 획득하기 위해 전쟁을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발단]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입조와 통신사를 요구했으나 조선은 거절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도록 하고, 그 자신은 나고야에서 원정군을 지휘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선봉이 되어 1592년 4월 13일 새벽안개가 자욱한 기회를 타서 부산으로 침략하였다. 부산진첨사 정발은 성내외의 군인과 주민을 동원하여 방어하였으나 결국 순절하고 성은 함락되었다.

[경과]

일본군의 총 병력은 20만 여 명에 이르렀고, 군대를 9번대로 나누어 조선을 침략하였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한 후 20여 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개성과 평양까지 점령하였고, 함경도까지도 유린하였다. 당시 양산은 양산군수 조영규가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하였기 때문에 체계적인 군의 동원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밀양부사 박진 영솔 하의 일부 지원군도 늦게 도착하여 쉽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양산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된 시기는 대략 4월 17일이었다.

이때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의병이 봉기하고 있었다. 영남에서는 곽재우가 4월 22일에, 이어서 김면정인홍이 의병을 일으켰고, 이와 동시에 호남에서는 고경명김천일, 호서에서는 조헌 등이 기병하였다. 1593년(선조 26) 전국의 관군과 의병은 총 17만 2천 4백 명이었는데, 의병의 수는 관군의 1/4인 2만 2천 6백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양산에서는 백수회(白受繪), 김영호(金永浩) 삼부자, 정호인(鄭好仁)·정호의(鄭好義) 형제, 안근(安瑾) 삼부자와 종제·종질, 최흥국(崔興國), 유정(柳汀)과 그 일문, 이수생(李秀生), 이몽란(李夢鸞), 이구(李鳩), 방익(房翼), 윤옥(尹沃)과 윤발(尹潑) 형제 등이 의병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결과]

7년간의 전쟁으로 조선의 국토는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각 방면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상자를 내어 조선의 인구는 감소되고 가옥과 재산의 손실도 막대하였다. 양산 지역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경제적인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 등으로 심각한 피폐상을 드러내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