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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의 요람, 통도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120
한자 韓國佛敎-搖籃-通度寺
영어의미역 Cradle of Korea Buddhism, Tongdosa Temple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채상식

[개설]

지금의 통도사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불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국지대찰(國之大刹) 불지종가(佛之宗家)’라고 한다. 이는 통도사의 사격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며, 자장율사(慈藏律師)[590~658]가 석가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것과 관련된다. 따라서 불보(佛寶) 사찰로 알려진 통도사에는 진신사리와 가사를 금강계단에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대웅전에 불상을 모시지 않는 사찰로 유명하다.

통도사는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하는 계율 도량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교학과 선(禪)을 소홀히 하는 계율 일변도의 사찰은 아니다. 율사뿐만 아니라 경과 논에 해박한 논사(論師), 선리(禪理)에 밝은 승려들을 많이 배출한 명실상부한 영취총림(靈鷲叢林)이다. 통도사자장율사가 창건한 후 왕실과 대중의 비호 속에 한국 불교의 불보 사찰로서의 구심체 역할을 했으며, 근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구하(九河)·경봉(鏡峰)·벽안(碧眼)·월하(月下) 등 무수히 많은 뛰어난 승려들을 배출하였다.

[자장율사의 피나는 구법과 통도사 창건]

통도사 창건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하여 「통도사 사적기」등에 남아 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볼 때, 통도사는 646년(선덕여왕 15)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이다. 그 사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자장은 636년(선덕여왕 5) 칙명을 받아 제자 실(實) 등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갔다. 자장은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에게 7일 동안 기도하여 범어(梵語)로 된 게송(偈頌)과 가사 그리고 사리를 받았다. 자장은 청량산에 머무는 동안 화엄 사상의 묘지(妙旨)를 터득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문수보살상에게 기도하여 꿈에 얻은 게송이 바로 화엄의 내용을 천명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후로 자장은 더욱 수행에 박차를 가하면서 당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갔을 때, 당 태종이 사신을 보내어 자장을 위로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물게 하고 후한 대접을 하였다. 당에 유학한 지 7년 만인 643년(선덕여왕 12)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자장은 귀국하면서 신라에 불상·불경 등이 미비함을 생각하고 대장경 한 질과 번당(幡幢), 화개(華蓋) 등을 마련해 왔다. 선덕여왕자장을 분황사(分皇寺)에 머물게 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선덕여왕자장을 궁중으로 초청하여 대승론(大乘論)을 강의하도록 했으며, 또 황룡사에서 7일 낮과 밤 동안 보살계본을 강의하니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 안개가 자욱이 끼어 강당을 덮었다 한다. 선덕여왕자장을 국통(國統)으로 삼아 승려의 모든 규범을 위임하여 주관하도록 했다.

자장은 이러한 좋은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여 불법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보름마다 계율을 설하고 겨울과 봄에는 시험을 치러 지계(持戒)와 범계(犯戒)의 차이점을 알게 했다. 또 지방 사찰을 두루 검사하여 승려의 과실(過失)을 징계하였다. 그리하여 비단 승려들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드는 것이 열 집 가운데에서 여덟, 아홉 집이나 되었으며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해마다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면 통도사의 구체적인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을까. 통도사의 창건은 자장이 귀국한 후 선덕여왕(632~646)이 재위한 때로서 황룡사 9층탑이 창건된 645년 이후인 646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시기에 통도사자장이 귀국한 직후에 불교를 통해 국가적인 또는 왕실의 위신을 높이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작용하여 창건되었다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이는황룡사 구층탑의 건립과도 연결되는 조처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통도사 창건 설화 중에 보이는 다음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삼국유사』권3, 탑상 제4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에는 소략한 내용만 보이지만 더 많은 내용은 「통도사 사적기」중의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과 민담에 전하고 있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 문수보살상 앞에서 부지런히 참회 정진했더니 문수보살이 범승(梵僧)으로 화하여 부처님이 친히 입으셨던 가사 한 벌과 진신 사리 1백 알, 부처의 두골(頭骨)과 손가락 뼈[指節], 염주, 경전 등을 주면서 말했다. ‘ 신라의 남쪽 축서산 아래에 독룡(毒龍)이 거처하는 신지(神池)가 있는데, 용이 독을 품어 사람을 괴롭히니 그대가 그곳에 금강계단을 쌓고 이것을 봉안하면 삼재(三災), 곧 물·바람·불의 재앙을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없어지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天龍)이 그것을 옹호하게 될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다.

그 후 귀국한 자장율사는 이곳 축서산 아래의 구룡 신지에 이르러 구룡을 위해 법을 설하고 이들의 항복을 받았으며, 이곳에 못을 메워 대가람을 건설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았다. 구룡 가운데 다섯 용은 오룡동(五龍洞)으로, 세 마리 용은 삼동곡(三洞谷)으로 갔다. 오직 한 마리 용이 가람을 수호할 서원을 세우고 남아 있기를 원하므로 조그만 못을 파고 머무르게 했다고 한다. 이 못이 지금의 구룡지이다. 수심은 비록 한길이 되지 못하지만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물이 줄지 않는다고 한다.

이상의 설화를 통해 볼 때, 통도사 창건은 국가 권력을 지방에 실현하기 위한 측면이 크게 작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령 커다란 못을 메워 통도사를 창건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의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는 직접적인 지배가 이루어졌음을 말해주며, 또 구룡의 존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영축산을 중심으로 한 토호 세력의 저항이 다소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와 같이 통도사의 창건은 국통이 된 자장이 국가 권력을 내세우고 이를 위해 계율과 또 이를 신앙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사리 신앙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자장통도사에 금강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계를 주었다. 이렇듯 통도사 창건에는 자장의 피나는 구법(求法) 노력과 철저한 자장의 계율 정신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자장은 경(經)과 논(論)에 능한 논사(論師)로 불리기보다는 율(律)에 능한 율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며, 신라의 불교계를 새롭게 정비하였던 것이다.

[계율 사상의 요람지, 금강계단]

불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금강계단은 통도사의 정신적 근거이며, 창사의 가장 중요한 기틀을 형성하고 있다. 앞의 인용에서 보듯이, 통도사가 창건되기 이전의 그 땅은 매우 큰 연못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경내 바닥에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있는데 이것을 열어 보면 1m 쯤 아래에 물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연못을 메우고 들어선 금강계단은 대웅전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다.

금강계단은 통도사 창건의 근본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최상의 성지(聖地)이며 전체 가람 배치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실로 통도사는 이 금강계단 이 있음으로 해서 삼보 사찰 가운데에서 불보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금강계단의 금강이라는 말은 금강석(金剛石), 곧 다이아몬드를 의미한다. 어떤 물건이라도 금강석을 깨뜨릴 수 없지만 금강석은 모든 것을 깨뜨릴 수 있다. 그래서 불경(佛經)에서는 이러한 금강석의 강인한 특징을 반야(般若)의 지혜를 표시하는 비유로 써 왔다. 곧 반야의 지혜로 모든 번뇌, 망상과 미혹의 뿌리를 끊어 버리므로 그 반야의 지혜가 금강석과 같다는 말이다.

반야의 지혜는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을 완성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이 삼학 가운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바탕은 계율의 실천에 있다. 계율이 기본적으로 몸에 배지 않고서는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계율이란 그릇과 같아서 자칫 잘못하면 깨질 우려가 있다. 그래서 계의 그릇은 금강과 같이 견고하게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진신 사리는 삼학의 결정체이자 반야의 물적 화현(化現)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금강과 같이 견고하며 그 사리를 모신 계단을 금강계단 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장은 당나라에 유학하기 이전에 철저한 계율의 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파계를 하고 백년을 살지 못하겠다.”는 자장의 철저한 계율 정신은 문수보살로부터 사리와 가사를 받은 사실에서 나타나며, 이 불신(佛身)이 통도사 계단에 안치됨으로써 통도사는 계율의 근본 도량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일은 부처님에게서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므로 통도사는 계율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오늘에 와서도 금강계단은 승려들의 유일한 정통을 잇는 수계(受戒)의 장소가 되어 왔다.

이러한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통한 자장이 강조한 계율 사상은 당시 왕실이 승정(僧政)의 기능을 강화하려는 분위기와도 상통한다. 이는 자장을 대국통(大國統)에 임명하여 승정을 주관하도록 한 사실에서도 짐작된다. 당시 자장이 교단 정비를 단행하면서 근거로 삼은 계율은 사분율(四分律)이었다고 한다.

[불사리 신앙의 요람지, 진신사리]

그러면 자장이 이렇듯 활약할 수 있었던 정신적인 기반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바로 불사리 신앙이 아닌가 한다. 자장이 가져온 사리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권3, 탑상 제4 「전후소장사리」에 보인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자장이 가져온 사리는 황룡사와 태화사에 봉안하고 일부 사리와 금란가사는 통도사에 봉안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사리는 범어 Sarira의 음역으로 설리라(設利羅) 혹은 실리(實利)라고도 하는 데 유골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사리라 하면 불사리라 하여 석존의 유골 곧 불골을 의미한다. 사리에 대한 신앙은 인도에서 시작하여 중국 수나라·당나라 때 크게 유행하였는 데, 신라에서도 진흥왕 대부터 비롯되었다. 이와 같이 상당히 깊은 유래를 갖는 불사리 신앙은 왕실에 의해 적극 수용된 측면이 있다.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사리 신앙은 왕실을 중심으로 유행하였으며, 성리학을 표방하던 조선시대에도 왕실에 의해 여전히 지속되었다. 가령 조선 초에 흥천사(興天寺)를 중심으로 한 왕실의 사리 공덕 신앙이 좋은 예가 된다. 어느 시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불사리 신앙이 왕실을 비롯하여 사회 각 계층에 보편화되었는데, 그 중심 사찰이 통도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선덕여왕 대에 자장이 당에서 가져 온 사리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진신사리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통도사에 안치된 사리를 후대에 분골하여 탑을 건립함으로써 사리 신앙의 중심지로 부각된 경우도 많다. 가령 묘향산 보현사, 태백산 정암사, 팔공산 동화사, 오대산 월정사, 금강산 건봉사 등의 탑에 봉안된 사리는 모두 통도사 진신사리의 분사리(分舍利)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통도사]

통도사 창건 이후 금강계단에 관한 몇 가지 기록 외에는 통도사에 관한 기록이 별로 없는 편이다. 「전후소장사리」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사리를 봉안한 석종(石鐘)이 개봉된 사실이 있었다. 곧 민간에 유포된 당시의 이야기로는 두 번에 걸쳐 안렴사(按㾾使)들이 석함(石函)을 개봉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 번은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에 예를 표한 뒤 돌 뚜껑을 들어내고 사리를 들여다보니 긴 구렁이가 사리를 보관한 석함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두 번째는 큰 두꺼비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 뒤로는 감히 돌 뚜껑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안렴사라는 관직으로 보아 고려 중기의 사례인 듯하다. 이는 현재 통도사에 남아 있는 배례석과 국장생석표가 고려 선종 연간에 세워진 것과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위의 자료에는 몽고와의 전쟁 시기인 1235년(고종 22) 상장군 김이생(金利生)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이 왕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던 차에 절에 와서 돌 뚜껑을 들어내고 예를 표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때 석함 속에 있던 유리통 하나가 금이 가서 유공이 마침 갖고 있던 수정 통을 기부하여 거기에 사리를 보관했다고 한다.

한편 원나라에 머물던 인도의 지공(指空)은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에 참배하는 것과 통도사 금강계단의 사리와 가사에 참배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았다. 그래서 지공은 고려에 와서 3년 정도 머물면서 1326년(충숙왕 13)에 금강산에서 계를 설하고,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을 참배하고 가사와 사리를 친견하였다고 전하는 기록이 있다.

지공이 고려로 들어올 때 가져온 『문수사리무생계경(文殊師利無生戒經)』과 같은 계통의 판본으로 추정되는 『문수사리최상승무생계경(文殊師利最上乘無生戒經)』 목판본이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문수사리최상승무생계경』은 “모든 중생이 유무(有無)와 성상(性相)에 집착하지 않고 수행하면 일체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다는 법리(法理)를 증득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공은 나옹(懶翁)에게 영향을 주어 침체되어 가는 고려 불교에 활력을 주었는데, 이는 현재 통도사에 지공·나옹·무학(無學) 등의 삼화상을 삼성각에 모신 것과도 관련된다.

[통도사의 수난]

고려 말에 이르러 통도사는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큰 수난을 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의 사정은 이색(李穡)이 지은 「양주통도사석가여래사리지기(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之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377년(우왕 3)과 2년 뒤인 1379년에 금강계단 이 큰 수난을 받게 되었다.

당시 통도사 주지였던 월송(月松)이 1377년(우왕 3) 왜적이 내침하여 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그것을 가지고 도망쳤으며, 2년 뒤 다시 왜적이 사리를 침탈하려고 했을 때 사리를 가지고 통도사를 빠져나와 개경으로까지 피난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사정은 1379년(우왕 5) 8월 24일 석가여래의 정골 사리와 가사 등을 가지고 개경에 당도한 월송이 평리(評理)의 관직에 있던 이득분(李得芬)을 만나 전한 이야기를 이색이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수난을 당한 통도사 금강계단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으로 또 다시 왜적에 의해서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왜적은 금강계단을 파괴하고 사리와 영골(靈骨)을 탈취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히도 부산 동래에 사는 백옥(白玉) 거사가 왜인의 포로로 잡혔다가 그 사리와 영골을 가지고 도망쳐 나왔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603년(선조 36)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惟政)은 왜적의 침탈을 염려하여 사리를 크고 작은 두 개의 함에 넣어 은사인 금강산의 휴정대사(休靜大師)에게 보냈다. 그러나 휴정은 “영남이 침해당하고 있는 이 마당에 동해변에 있는 이곳 금강산도 안전하지 못하다. 영축산은 문수보살께서 친히 계단을 설치하라고 부촉한 장소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믿음의 보배인 사리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 터를 수리하여 사리를 봉안하라”라고 하면서 함 하나는 돌려보내고 나머지 함은 태백산 갈반지(葛盤地)에 봉안하게 했다.

이 갈반지는 오늘날의정암사(淨岩寺)로 추정되는데, 이도 역시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휴정대사의 명을 받은 사명대사는 계단을 수리하여 사리를 안치하였다. 그 뒤 1652년(효종 3) 승려 정인(淨人)이, 1705년(숙종 31)에는 승려 성능(性能)이 중수했으며,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다시 중수하면서 계단 주변에 석책(石柵)을 둘렀다. 최근에는 가까이 가서 참배할 수 있도록 석책을 제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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