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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복재 제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3060
한자 龜伏齋題詠
영어의미역 Attaches a Subject, Poem Recite in Gwibokjae Buddhist Service for the Deceased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성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한시
작가 유진룡(柳震龍)[1874~1918]
창작연도/발표연도 1907년(순종 1)연표보기

[정의]

1907년(순종 1) 유진룡이 서당 귀복재의 기문을 짓고 나서 유순영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칠언율시의 한시.

[개설]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따라 문화유씨(文化柳氏) 칠현을 모신 칠현사가 훼철되고 이곳에 딸린 강당도 철거됨에 따라 문화유씨 문중에서 1907년(순종 1)에 칠현사가 있던 자리의 동쪽 기슭에 서당을 세웠다. 그런데 서당이 있는 곳의 지형이 마치 거북이 엎드려 있는 것 같다고 해서 건물을 귀복재(龜伏齋)라 하였다고 한다.

서당이 지어지자 귀복재의 수축을 주도한 유순영(柳洵永)이 유진룡(柳震龍)에게 기문을 적어줄 것을 청하여 유진룡이 「귀복재기(龜伏齋記)」를 지었는데 이 기문에는 귀복재를 짓게 된 연유가 잘 나타나 있다. 유진룡은 이와 더불어 유순영이 지은 「귀복재」에 차운하여「근화족숙순영귀복재운(謹和族叔洵永龜伏齋韻)」을 지었는데, 이 시가『양산향교지』와 유진룡의 문집『만사집(晩沙集)』에 실려 있는 「귀복재 제영」 한시이다.

[구성]

유순영의 시에 화운한 칠언율시 형식의 한시이다.

[내용]

귀복재가 문화유씨 문중의 사당에 딸린 서당이라는 성격을 반영하여, 학문연찬과 귀복재의 주변 분위기를 언급한 것이 주된 내용이 되고 있다. 또한, 귀복재가 후손들이 마땅히 공부할 곳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문중의 뜻을 반영하여 서당처럼 쓰고자 세워진 것임이 시 전편에 드러나고 있다.

수련(首聯)은 귀복재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연유와 서당을 신축하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으며, 함련(頷聯)에서는 귀복재가 위치한 곳의 주변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심장방외지(深藏方外地)’와 ‘장쇄동중(長鎖洞中)’이라는 구절로 보아 귀복재가 읍내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고, 산기슭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련(頸聯)에서는 ‘예악삼천자(禮樂三千字)’와 ‘금서사십년(琴書四十年)’이라는 성어를 사용하여 문화유씨 가문이 유서 깊고 경륜 있는 인재들의 산실이라는 자긍심과 앞으로 이 귀복재가 예악과 학문을 닦는 수양처로 쓰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드러내었다.

결련(結聯)에서는 한유(韓愈)의 「고의(古意)」라는 시에서 유래한 옥정련(玉井蓮)의 성어를 이용하여 귀복재에서 공부한 인재들이 나라에 귀하게 쓰일 것이라는 기대를 나타내었다.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명부를 연방(蓮榜)이라고 했기 때문에 연꽃을 딴다는 것은 진사시에 합격한다는 뜻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봉우리 하나가 푸른 산앞에 거북이처럼 엎드려 있는 곳에/ 새로 초가 재실을 지으니 족히 서까래 몇 개는 될 듯/ 아름다운 자연은 방외의 땅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고/ 안개 자욱한 승경은 골짝이 속에 오래도록 가두어놓았네/ 가문에서는 예악 삼천자(三千字)를 전하고/ 사람들은 거문고와 시서를 평생 끼고 사는 도다/ 신이 내린 선물이 훗날에 연잎 위에서 노닐리니/ 돌아올 때 옥샘에서 향기로운 연꽃을 꺾으리라.(一峰龜伏碧山前/ 新築茅齋足數椽/ 水石深藏方外地/ 煙霞長鎖洞中天/ 家傳禮樂三千字/ 人坐琴書四十年/ 神物他時遊葉上/ 歸來玉井採芳蓮)”

[의의와 평가]

「귀복재 제영」은 일제의 침략 야욕이 노골화되는 시점에 문중의 뜻을 모아 서당을 세우고 국가의 백년대계를 도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좋은 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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