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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1198
한자 獨立運動家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Fighter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은정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 출신으로 일제에 저항한 인물들.

[개설]

양산 지역에서의 본격적인 항일 독립 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양산 지역에서는 인근의 밀양이나 울산 지역에서처럼 3·1운동을 주동적으로 이끈 비밀단체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윤현태와 같은 선각자들이 조선국권회복단에서 활동한 만큼 윤현태의 영향을 받은 지인과 후배들의 조직체 결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양산 지역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은 청년운동·소년운동·여성운동·농민운동·학생운동 등을 통하여 지속하여 갔다.

[의병전쟁]

1907년 일본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키자 수많은 군인이 이에 반대하여 의병에 참여하였다. 이로써 의병항쟁은 전국적으로 전 계층에 걸쳐 확산하였다. 양산 지역에서도 서병희(徐炳熙)가 중심이 되어 의병항쟁을 일으켰다. 서병희는 1907년 11월 의병장 허위(許蔿)의 부하로 들어가 의병활동을 시작하여, 1909년 독립의병장이 되어 활동하다 순국할 때까지 2년여 동안 경상남도 전역에 걸쳐 크게 활약하였다.

[3·1운동]

항일운동의 분수령을 이룬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양산 지역에서의 3·1운동은 신평의거와 양산읍의거가 있다. 1919년 3월 13일 신평 장날을 기해 통도사 부속 지방학림 학생 김상문(金祥文)을 선두로 학생과 통도사 승려들이 신평리 장터에서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를 감행하였다. 시위에 참가한 김진옥(金鎭玉)은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선고 받았고, 김상문은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탈출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참가하였다.

한편 양산읍 시위는 부산과 동래 지역에서의 3·1운동을 알게 된 엄주태(嚴柱泰)의 주도하에 전병건(全秉健), 박삼도(朴三道), 이기주(李基周), 정주봉(鄭周奉) 등이 1919년 3월 27일 양산 장날 독립 만세 시위를 일으킨 것이다. 양산 지역 헌병대원들은 시위 주동자들을 검거하였으나, 1차 시위 때 검거를 모면했던 이귀수와 류계문(柳桂文) 등이 1919년 4월 1일 다시 의거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양산 출신 인사들 가운데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원으로 활동한 인물로는 윤현진(尹顯振)이규홍(李圭洪) 등이 있다. 1892년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서 태어난 윤현진은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안희제와 백산상회를 거점으로 국내외의 독립 운동 세력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항일운동을 해나갔다. 3·1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 핵심요원으로 참가하여 초대 재무차장과 내무위원 등을 지냈다. 이규홍은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일광상회에서 위장무역을 경영하다가 1919년 상해 망명길에 올라 임시정부의 요직을 거쳐 국무위원을 역임하였다.

[1910년대 독립단체의 항일투쟁]

임시정부 이외에 수많은 독립단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양산 출신 인물들로는 우선 1919년 조직된 철원애국단의 김상헌(金祥憲), 이석윤(李錫允) 등이 있다. 김상헌은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역할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석윤은 함경남도 안변군 석왕사에서 승려 생활을 하다가 1919년 5월 신상완 등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배포하였고, 군자금을 모금해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하다가 일본 경찰에 여러 차례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동단(大同團)에서 활동한 박민오(朴玟悟)는 양산 통도사 출신의 승려로 1919년 서울 불교중앙학립에 유학 중 3·1운동에 가담하였다. 양산 출신의 김덕봉(金德峰)·김봉길(金鳳吉)·서상건(徐尙鍵) 등 10여 명을 포섭하여, 1921년 8월 12일 진주 항일운동인 제2차 독립 만세 운동을 추진하였다.

흥업단(興業團)에서 활동한 인물로는 심상욱(沈相郁)·박사숙(朴士淑)·정규영(鄭圭永) 등이 있다. 이들은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이만준 등 14명과 함께 경상북도 경찰국 고등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대 양산의 청년운동과 신간회]

1920년대 전반기 국내에서는 실력 양성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사상의 흐름은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양상으로 변천하면서 청년운동 역시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기 좌·우 합작운동이 전개되면서 1927년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가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3·1운동을 주도한 김철수(金喆壽), 엄주태(嚴柱泰), 전병건(全秉健) 등의 주도로 양산의 지식인, 부호, 재력가 등이 참여하여 1920년 7월 양산청년회가 결성되었다. 당시 선출된 임원은 김철수(金喆壽), 금석호(琴錫浩), 최학선(崔學鮮), 함열(咸悅), 엄주화(嚴株和) 외 14명이었다. 양산청년회는 각종 친선대회, 시국계몽 강연, 야간학교 개설 등 실력 배양 운동을 통해 양산 지역의 항일세력을 결집해 나갔다.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결성된 대표적 항일단체인 신간회 양산지회양산청년회의 지도간부들인 김철수, 전병건, 이기주, 최학선 등의 주도로 1928년 3월에 창립되었다. 1920년대 후반 사회주의의 세력의 영향으로 양산청년회전병건의 주도 하에 1927년 양산청년동맹으로 거듭나게 되었으며, 점차 좌파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따라서 양산청년동맹의 주도로 창립된 신간회 역시 좌파의 영향력이 강하였으나 양산청년회를 이끌어온 민족주의 성향의 인사들 역시 여전히 양산청년동맹과 신간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1930년대 농민운동]

1930년대 초 양산농민조합의 결성은 양산청년동맹신간회 양산지회에 의해 주도되었다. 양산농민조합은 일본인과 한국인 대지주들을 압박하면서 소작 조건을 혁신하려고 맹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의 활동 가운데 특히 세간의 주목을 받은 사건은 1932년 양산농민조합 구속간부의 석방을 위한 양산경찰서 습격사건이었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 간부가 소작료 인하 시위를 하다가 양산경찰서에 구속되자 이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집행위원장이었던 전병건을 중심으로 김장호(金章浩), 김외득(金外得), 김태근(金泰根) 등 300여 명의 조합원이 양산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양산경찰서의 발포로 조합원 윤복이(尹福伊)와 이만줄(李萬茁)이 총을 맞고 현장에 쓰러져 사망했다.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 이후 농민조합의 핵심간부들이 구속과 일본 경찰의 계속적인 감시와 탄압으로 양산농민조합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1940년대 학생운동]

양산 지역 출신 일본 유학생 중 항일운동에 참여한 인물로는 서장주(徐璋珠)권오황(權五煌) 등이 있다. 서장주는 당시 경상남도 양산군 양산면 남부동 출신으로 1942년 일본 동경고등공업학교 재학 중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절감하여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제 징용된 노무자들을 포섭하여 일제의 군수시설을 파괴하기도 하고 노무자로 가장하여 요코하마 일대의 노무자 합숙소에 침투하여 공작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통도중학교는 1919년 신평 만세 운동의 진원지였던 통도지방학림을 계승하였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의 요시찰학교가 되었다. 조병구(曺秉球) 선생은 어느 애국지사가 쓴 만장(輓章)의 내용을 입수하여 학생들에게 익히게 하였는데, 그것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었다. 1941년 9월 3일 양산경찰서의 형사대가 학교를 급습하여 김말복·조병구·신정균·배기철 선생을 경상남도 경찰국으로 이송하였다. 그 후 통도중학교는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1944년 1월 21일 제5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폐교되고 말았다. 하지만, 광복 후 1946년 9월 16일 보광중학교로 개교하였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