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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007
한자 朝鮮時代
영어의미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정수

[정의]

1392년(태조 1)부터 1910년(순종 4)까지 경상남도 양산의 역사.

[행정구역]

양산시는 1413년(태종 13)에 양산군(梁山郡)으로 개칭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동래부(東萊府)에 편입되었다가 1603년(선조 36)에 복구되었다. 1897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읍내(邑內)·동면(東面)·상서(上西)·하서(下西)·상북(上北)·하북(下北)·구포(龜浦)·대저(大猪)의 8개 면을 관할해 오다, 1906년에 구포면과 대저면을 동래군과 김해군에 넘겨주는 동시에 울산군의 외남면(外南面)과 웅상면(熊上面)을 편입하였다가, 1910년 외남면을 울산군에 환부하였다.

[행정과 군사]

조선시대 지방 통치 방식의 근간은 군현제(郡縣制)였다. 군현제란 전국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행정 구역으로 구분하고, 중앙 정부가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는 지방 통치 방식이다. 15세기의 양산은 경상도 관할의 15개 군의 하나로서, 경상좌도의 경주도 관내에 속해 있었는데, 종4품 군수가 지방관으로 파견되는 군이었다.

조선 초기에 조선왕조는 군현 아래의 촌락을 직접 지배하기 위해 새로운 촌락 지배 체제로써 면리제(面里制)를 실시하였다. 양주군을 1413년(태종 13)에 양산군으로 고쳤는데,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에 의하면 양산군의 임내로 동평현(東平縣)이 존재하였다. 동평현은 신라시대에는 동래군의 속현이었으나 1018년(현종 9)에 양주의 속현이 되었다. 그 후 동평현은 동래와 양주의 속현으로 이동이 있었으나 1428년(세종 10)에 동래현에 소속되었다.

고려 후기까지 전국적으로 광범하게 분포해 있던 향·소·부곡·장·처는 조선 초기에 거의 임내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는데, 양산군의 부곡과 소도 모두 고적조에 기록되고, 범곡부곡이 석곡촌, 원포부곡이 원포리로 바뀐 것으로 보아, 양산군의 향·소·부곡은 대개 리·촌으로 개편된 것으로 보인다.

농업 기술의 발전에 따른 생산력의 증가와 인구의 증가에 의한 자연촌의 성장으로 17세기 이후가 되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몇 개의 촌을 묶은 큰 규모의 리가 점차 쪼개졌다. 양산군의 면 편제는 18~19세기에 이르면 면과 방이 혼용되고 있고, 대체로 읍내면·상동면·하동면·상서면·하서면·상북면·하북면·대상동면·대하동면·좌이전면의 9~10개 면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군사 체계는 15세기 중엽에 와서 군역 제도의 정비와 더불어 중앙의 오위 체제와 지방의 진관 체제로 정비되었다. 경상도의 경우 안동·경주·울산·창원·대구·진주·성주·상주 등 8개 진으로 나누어 그 주위의 고을들을 합속시켰다. 양산은 경상좌도 울산좌병영의 관할 아래 있었으며, 경주진관에 속하였다.

[경제와 사회]

15세기 전반기 양산군의 호구 수는 425호, 1,788명이다. 호당 인구 수는 약 4.2명으로 낮은 편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보면 양산군의 토지는 2,030결로 논이 약 45%라고 하였다. 양산은 낙동강양산천 등 두 개의 큰 물줄기가 있어 풍부한 수량이 확보되었기에 벼농사를 할 때 봄 가뭄에 대한 걱정이 다른 지역보다 낮아 논의 비율도 다른 지역보다 높았다. 그래서 조선 전기 양산군에는 쌀을 비롯한 기장·보리·조 등 곡물이 재배되고 있었으며, 굴·기름·버섯·과일·약재·차 등 여러 기호품들이 함께 재배되고 있었다.

조선 후기 양산의 인구는 1878년의 『양산읍지(梁山邑誌)』에 호수가 1,664호, 인구가 12,021명이었으며, 토지는 1832년 당시 논이 79%에 이르고 있어 논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농업은 임진왜란으로 황폐화된 토지를 복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양산 지역은 주로 낙동강 하류의 비옥한 토지를 개간하여 경작지로 만들었다.

양산에서 생산되는 수공업품은 직물·가죽·종이·도자기 등 다양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양산의 대표적 수공업품은 삿자리였는데 갈대로 삿자리와 삿갓 등을 생산하였다. 그리고 도자기 생산은 조선 후기까지 줄곧 이어졌다. 양산 지역의 수산물로는 은어·황어·웅어·숭어 등으로 모두 하천이나 호수 등 내수면에 사는 담수어, 하구 등에 사는 어류, 바다에서 하천으로 올라오는 어류 등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산조에는 대저도에서 낙동강을 따라 유포(杻浦)-동두저(東頭渚)-동원진(東院津)-호포(狐浦)-구읍포(仇邑浦)-화자포(火者浦)-가야진(伽倻津)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을 지나면 밀양 삼랑진에 도착하는데, 삼랑진까지는 큰 배들이 오고갈 수 있어 많은 물자를 수송하였다. 특히 양산 지역에서는 낙동강 수운이 중요한 운송 수단이 되면서 장시가 발달되었고 상품 유통의 중요한 나루와 포구는 위로 밀양 삼랑진에 연결되고, 아래로 김해 칠성포, 부산포와 연결되면서 유통의 거점이 되었다.

양산 지역은 대일 관계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일본 사절들의 상경로였으며, 양산 동원진은 대일 무역품의 수합 창고였다. 그밖에 왜관에 오는 사절에게 일정한 체재 식량을 지급하였는데, 경상도 지역의 전세로써 충당하였다. 양산은 경주·밀양·기장·대구 등지와 함께 동래에 왜료를 바쳐 부산포 왜관에 지급하도록 되어 있었다.

[개항기의 변화]

1895년(고종 32) 5월 종전의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었다. 8도제 아래의 경상도는 진주부·동래부·대구부·안동부의 4부로 편성되었고, 양산은 동래부에 속하는 10개 군의 하나였다. 그러나 23부제는 민정이 불편하고 번잡하며 재정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폐지되고, 1년 뒤에 다시 도제로 환원되었다. 13도제 하의 양산군의 실태는 『양산군읍지(梁山郡邑誌)』에서 그 대략을 볼 수 있다. 당시 양산군의 호는 3,204호, 인구는 14,576명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지주제를 한국 농촌 사회를 지배하는 기둥으로 삼았으며, 일본인 지주는 그 핵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일본인 지주는 주로 부산·동래·김해·진영·양산·삼랑진·밀양·언양·금산 등지에 거주했다. 부산 관내 일본인 농사자의 지역별 상황을 보면 전체 자본금 1,744,730원 가운데 부산이 57%로 가장 많고, 다음이 김해(17%)·밀양(14%)·양산(4%)·영산(3%)·구포(3%)·언양(1%)·금산(0.4%) 순이다.

상업과 관련하여 1880년대를 거치면서 각종 무명 잡세가 증가하면서 유통이 단절될 정도여서 무명 잡세를 혁파하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양산에서는 임해연세(臨海沿稅)·물금세(勿禁稅)·용당세(龍塘稅) 등이 거론되었는데, 즉 물금포·용당포의 무명 잡세가 큰 폐단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개항기 의병 항쟁은 1907년 8월 군대 해산을 계기로 새로운 전환을 맞았는데, 양산군에서는 의업(醫業)을 경영하던 서병희(徐炳熙)가 중심이 되어 의병 항쟁을 일으켜 일제에 항거했다.

한편 양산에서는 신교육을 통한 민족 교육을 바라는 기운이 모여 근대 학교가 1900년대에 들어와 설립되었다. 양산군수 권중은(權重殷)이 양성학교(養成學校)를 설립한 것이다. 그 뒤 1909년 양산군수 이원호는 군내 3곳에 학교를 더 설립하였고, 양산읍 이외 지역에서도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통도사에서 세운 명신학교가 유명하다. 양산군 외남면에는 사립 원창학교(元彰學校)가 설립되었다. 양산군 상북면에는 이규한(李圭漢)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신명야학교(新明夜學校)가 설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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