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3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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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龜浦復設 |
이칭/별칭 | 용연리 세 비석의 유래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
집필자 | 김국희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내원사 입구에 있는 세 비석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상황]
1983년 양산군에서 발간한『내 고장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1869년(고종 6)에 당시 양산군 소속이던 구포면이 동래군에 탈속되게 되었다. 양산군민들이 양산군으로 환속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사림 우석규·서상로·이기수 세 사람이 직접 한양에 가서 임금을 배알하고 향론을 아뢰도록 선정되었다. 막상 한양에 올라갔으나 아는 사람이 없어 임금을 배알할 가망이 없었다.
세 선비는 남산 봉수대에 봉화를 올려 임금께 알리려 했는데, 결국 의금부에 체포되어 신문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봉화를 올린 사연을 말하자 당시의 영의정 이유원이 삼인의 의기를 가상히 여겨, 봉화한 사건을 면책하고 구포면을 양산군에 환속하도록 조치했다. 향민들이 그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세 비석을 세웠는데, 영의정과 복설 당시의 군수와 비석 건립 당시의 군수를 기린 비이다. 세 선비는 관직이 없어 영의정의 비석 뒷면에 이름만 병기했다.
[모티프 분석]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헌신한 세 선비의 이야기이다. 실제 비석에는 인물들의 이름만 간단히 기록되어 있는 반면, 설화에는 구포를 다시 양산에 환속하는 과정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지역민의 자긍심이 내포되어 있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