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33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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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池榮璡 |
영어음역 | Ji Yeongji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순천 |
성격 | 정치가|국회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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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 |
성별 | 남 |
생년 | 1898년 12월 8일 |
몰년 | 1972년 |
본관 | 충주 |
대표경력 | 국회의원 |
[정의]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정치가이자 경제인.
[활동사항]
지영진은 서울 보성중학교 2년 중퇴 후 청년기에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신간회 활동에 참여했다. 1928년 김철수(2대 경상남도지사, 도쿄 2·8 독립운동 주도) 등의 주도로 창립한 신간회 운동에 동조하여 1929년 2월 20일 신간회 양산지회 임시집행부 부회장을 맡았으나, 그 이듬해 5월에 신간회 양산지회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신간회가 사회주의 계열의 전병건 등 소장 활동가를 주축으로 한 친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하게 되면서, 당시 지주계층에 속했던 김철수와 지영진 등은 신간회 양산지회 활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지 못했다.
신간회 창립 당시의 강령에 따라 경제 자립을 목적으로 했던 양산협동조합 설립에도 관여하여, 1929년 3월 양산협동조합 발기인 위원, 1930년 4월에는 창립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양산협동조합 임원을 맡지는 못하였다.
1930년대에 농지 800여 두락(약 50㏊)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1933년 9월 양산수리조합 대표 자격으로 경상남도에 풍수해 대책을 요구하였고, 1943년 3월 16일 양산면장에 임명되어 1945년 3월 31일까지 재임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청에 의해 1945년 10월 24일 초대 양산군수로 임명되어 1946년 4월 20일까지 재임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소속으로 양산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49년 10월 국민회의 경상남도지부 간부 선거에 부위원장으로 입후보하였으나 선출되지 못하였다. 이후 영도에 있는 대한도기㈜를 운영하면서 지역의 청년들을 다수 취업시켰다.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양산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고,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양산 지역구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무투표 당선되어 국회 상공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나 선거 소송에서 상대방 후보의 등록을 방해하였다는 이유로 1959년 7월 22일 당선무효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해 9월 양산 지역구 보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다시 출마하여 민주당 후보 서순칠을 제치고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