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3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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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君浩 |
영어음역 | Son Gunho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평산동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현라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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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남도 양산시 평산동 |
성별 | 남 |
생년 | 1901년 |
몰년 | 1976년 |
본관 | 경주(慶州) |
대표관직 | 웅상면장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사항]
손군호는 1901년 9월 24일에 경상남도 양산군 웅상면 평산리(현재 경상남도 양산시 평산동)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던 손군호는 신학문을 배워야만 우리나라도 문명화가 빨리 되겠다는 생각에 보통교육과정의 명정학교와 중등교육 과정의 지방학림이 있던 범어사를 찾아갔다. 집과의 거리가 수십 리 원거리이었기에 범어사에 승적을 두기로 작정하고 먼저 입적하여 수도승이 되고 명정학교에 입학하였다.
만학이었지만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교사들로부터 우리나라 역사며,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하여 우리 민족을 식민지 노예로 수탈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또한, 불교계의 역사에서 나라를 위하여 순절한 승려들과 관련한 이야기를 듣고 교훈을 받게 된다. 손군호는 초등학교 과정을 배우는 생도에 불과했지만, 그 당시의 의식구조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으며, 호국 불교 정신과 민족의식을 강조하는 학교 교육 방침에 따라 정신적으로 많은 성장을 하였다. 또한, 당시의 불교학자이며 불교계 지도자인 한용운의 저서를 통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는 다시 평화를 되찾아 이 평화를 항구화하기 위하여 세계 식민지 문제와 약소민족 해방 문제가 범세계적인 문제로 대두하였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도 지식인과 학생 청년들 사이에서 우리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구상하게 되었으며, 이를 실천에 옮길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이즈음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이 주동이 된 조선독립청년단의 독립선언이 발표되었으며, 뒤따라 국내에서는 천도교·불교·기독교 등 각 종교 단체 대표들과 민족 대표들이 협의하여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하순경 불교계 지도자 한용운이 범어사를 다녀갔고 뒤따라 범어사에서 김영규, 차상명 등 7명이 상경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발표와 독립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1919년 3월 4일에 김법린과 김상헌이 독립선언서와 서울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범어사로 돌아왔다. 이에 범어사에서도 중견 청년 승려 김봉한·김영규·차상명 등과 지방학림 학생 김상기·허영호, 명정학교 학생 김한기 등은 지방학림과 명정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1919년 3월 18일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읍에서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 운동을 의거하기로 하였다.
당시 손군호는 명정학교 학생으로서 독립만세 운동 준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1919년 3월 17일 밤 졸업생 송별회를 마치고 동래읍으로 잠입할 때도 행동을 같이하였다. 손군호는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읍 복천동(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의 불교 포교장에서 일본 헌병과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 당할 때 피신하였다가, 1919년 3월 19일 동래 전역을 누비며 격문 살포와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과 문초 끝에 부산감옥으로 압송되어 투옥되었으며, 재판에 회부되어 부산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6월의 선도를 받고 부산감옥에서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1945년 해방 후에 손군호는 고향인 경상남도 양산군 웅상면 면민들의 추대를 받아 웅상면장을 역임하였다. 1976년 5월 3일 76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