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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진왜란의 격전장 : 작원관 부근의 황산강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A010203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낙동강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기혁

임진왜란의 격전지 가운데 하나가 낙동강 변에 있는 양산 일대이다. 왜군이 동래성을 함락하고 영남로를 따라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거쳐야 할 곳이 바로 이곳 양산 일대였다.

조선의 밀양부사 박진은 왜군의 침입을 대비하여 삼랑진 부근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 지역에는 작원(鵲院)이 있었는데 이곳은 낙동강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관문이었다. 물론 육지에서 낙동강을 따라 나가기 위해서도 이 문을 지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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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원관

즉 작원은 낙동강과 육지를 잇는 관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로 영남의 제일의 요충지였다. 이곳이 함락되면 영남 내륙이 위험하기 때문에 일본군이 밀양 쪽으로 진공하지 못하도록 그 입구가 되는 삼랑진의 작원관(鵲院關)을 방어하는 것이 방어의 최선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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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원관

임진왜란 당시 밀양부사 박진은 수병(手兵) 300여 명을 거느리고 밀양부로 돌아온 뒤 입구를 지키기 위해 흩어진 군사들을 다시 규합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호응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제대로 전투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적군은 밀려오고 있었다.

이 날은 짙은 안개로 지척을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부사 박진이 황산잔도(黃山棧道)가 있는 작원관까지 미처 진출하지도 못한 사이에 이곳을 지키던 병사들은 패하여 도주하기에 이르렀다. 겨우 부사 박진의 군관과 일부 병사들만이 황산의 잔도를 막고 있는 것을 본 적장은 은색 가마를 타고 은색 우산을 쓴 채 전진하였다. 이를 본 박진은 직접 나서서 힘을 다해 적군을 무찔렀고, 군관 이대수(李大樹)·김효우(金孝友) 등 2명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등 격렬한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차마 공격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던 험한 산세를 타고 적군이 고개를 넘어 아군의 진로를 공격함에 따라 그만 밀양성으로 후퇴하였다. 밀양부로 후퇴는 한편으로 이곳에 전방기지를 구축하기 위한 것도 목적이었으므로 부사 박진 일행은 작원관 쪽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작원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박진은 작원 계곡의 다리를 지키기 위해 대나무 통에 들어 있는 화살을 불어 일본군의 조총을 막아내자 적군은 연일 이 관문을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적군은 양산 지역의 측면을 함락시키고 우회하여 작원관의 후방으로 쳐들어왔고, 수비하던 아군 병사들이 모두 흩어지자 박진은 밀양부의 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비록 박진 부대는 패하였지만 이 전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박진은 3백 명의 군사와 약간의 경상우도 지원군, 그리고 지방민의 지지를 얻어 일단 적군의 공격을 지연시킨 셈이라 할 수 있다. 즉, 왜의 제1군은 동래로부터 벌떼처럼 쳐들어오다가 작원관에 이르러 비로소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밀양부로 향하던 박진 부대는 큰 길을 택하지 못하고 밀양강 하류에 있는 광탄(廣灘)으로 건너오다가 다시 많은 부하를 잃게 되었다. 강물의 수심을 모르고 앞 다투어 건너려던 경상우도 지역 병사들은 태반이 물속에 익사하고 말았다. 작원관에서의 치열한 접전 끝에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그 전투의 공로로 박진은 경상도좌병사로 승진하였다. 그 후 박진 좌병사는 울산·경주·안강 등의 전투에 참가하여 좌병영 군사들을 독려하고 지휘하였다.

이상의 내용에서 살펴보면 당시 관군과 백성들이 낙동강의 관문인 작원관을 지키고자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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