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A010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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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기혁 |
내리쬐는 햇빛 아래서 검게 그을린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가며 오늘도 용당 사람들은 자신이 키우는 작물에 애정을 쏟고 있다. 그들에게 딸기나 수박은 단순한 과일이 아닌 자식이요, 작품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한낮의 더운 햇빛도 견뎌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아마 홍수가 아닐까 생각된다. 모종부터 시작해서 거름 주고 물주고 심지어 노래까지 들려줘가며 애정을 부은 작물들이 물에 잠겨 모두 제 손으로 버려야 할 때의 심정은 단순한 금전적 아쉬움과 허전함 그 이상일 것이다.
용당은 유독 이러한 홍수가 잦은 편이다. 이곳을 흐르는 낙동강은 그 폭이 넓고 강바닥의 굴곡이 심하지 않아서 바닥을 따라 유유히 물이 흐르기 때문에 속도가 느린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비가 많이 내리게 되면 이곳의 물은 빨리 흐르지 않아서 물이 넘치게 되고 홍수가 자주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용당들에서 홍수로 인한 침수는 1년에 2~3번 정도 일어난다. 도시 사람들에게 홍수 이야기는 뉴스에서 보는 정도일 뿐이지만 이 곳 사람들에게는 코앞에 닥친 현실이다.
다른 지역은 가뭄으로 고생하는데 반해 이 지역은 홍수로 애써 일군 딸기와 수박을 잃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자주 발생한다고 하였다.
“여름에 비가 억수로 퍼부을 때는 논이고 밭이고 물이 어디까지 다 들어온다 아이가. 지금은 저짝(저쪽) 도로 잩에(곁에) 양수기를 세워둬서 요즘에는 물이 잘 안 들어오는데 옛날에는 많이 들어왔다. 그게 다 저기 낙동강 때문 아이가. 밭에도 물 많이 든다. 그런데 물이 한번 들어오면 물에 담긴 딸기는 팔지도 못한다 아이가. 홍수가 들기 시작하면 마을 앞까지 물이 다 든다. 요 앞에 도로까지 물이 들어온다니까. 집 안에까지도 물이 들어오고 그란다. 거기다가 하우스까지도 물이 다 들고 그란다. 딸기는 일찍 하니까 물에 잘 안 드는데 수박하면 물에 잘 들 때가 있다. 수박도 일찍 나오는 거는 물이 안 드는데 조금 늦어서 6월 말이나 7월까지 되면 물이 들어서 물에 잠기는 수가 있다 아이가.” (김갑식, 당곡마을 농민, 65세)
그래도 지금은 철길 옆에 물이 못 들어오도록 막아 놔서 요즘에는 물이 잘 안 드는데 들에는 아직까지 물이 잘 들어 홍수 나기 시작하면 낮은 데는 밭에도 물이 들기도 한다고 그 고충을 털어 놓았다. (하용필, 중리마을 농민, 76세)
특히 엄청난 피해를 몰고 왔던 태풍 루사와 매미의 경험은 태풍에 대한 무한한 두려움을 갖게 하였다.
“태풍이 제일 겁난다. 태풍 친다고 바람이 막 불면 하우스도 다 날아간다 아이가. 그래 가지고 작년이랑 재작년에 여기에 군인들 여럿이 와서 도와주고 했는기라. 아마 수백 명은 왔었던 것 같다. 작년 말고 3년 전, 2년 전 해서 한 2년 동안 하우스가 절단 났었다. 군인들하고 경찰관들하고 와가지고 전부 다 치워주고 그때 그 사람들 욕봤다(수고했다). 온데(전부) 뻘 칠갑(진흙으로 뒤덮인 모습)을 해가지고, 어디 학교에서도 오고 많이 왔다 그랬다. 대학생들도 여름철 되면 한 번씩 와가지고 많이 도와주고 간다 아이가. 우리 회관 여기서 자고 많이 도와주고 간다. 어른들이 도와주러 오면 악기도 가지고 와서 노래도 불러주고 하는 기라.”(하자용, 중리마을 농민, 73세)
태풍에 대해서는 “하늘이 하는 건데 뭐 어디 항의할 때도 없다.”고 하며, 그래도 매미 때는 여기가 재해특별지역으로 선포돼 가지고 보상금이 조금씩 나왔으며 군인들의 도움으로 복구하게 된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김영해, 당곡마을 농민, 56세)
홍수는 하늘이 뜻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들은 홍수가 나도 어디 한군데 호소할 곳이 마땅치 않다. 그런 이들에게 군인들이나 학생들 또는 일반인들이 내미는 손길이 제일 큰 힘이 될 것이다.
마을에서 만난 여든 세 살의 어느 할머니의 말씀 속에 물난리가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 마을에 사셨던 할머니는 마을에 물난리가 나면 누구 한 사람도 와서 도와주는 경우는 없었고 사람들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될 즈음에 일본인들이 겨우 배급으로 강냉이 조금 주는 정도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다행히 물난리가 나면 정부에서 조금 도와주기는 했다고 한다.
또 할머니의 집을 비롯하여 마을주민들의 생활터전도 홍수를 피해 옮겨다니다보니 지금의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인생뿐만 아니라 마을주민들의 삶의 공간인 거주지가 바로 이 마을의 홍수의 역사와 같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홍수도 하늘의 뜻이려니 받아들이고 큰 원망 없이 이제는 틈틈이 찾아오는 나그네가 되어버린 홍수를 맞을 준비를 하는 그들을 보면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겨남이 느껴진다. 그렇게 복작거리며 서로 돕고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진짜 우리네가 살아가는 세상사는 맛이 아닐까.
▶ 태풍 매미의 기억
2002년 8월 태풍 루사는 이곳 용당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홍수로 낙동강 수위가 상승하면서 낙동강 하류 일대의 양산 용당리, 김해 상동, 부산 대저 일대의 농민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당시 이 홍수로 용당리 일대 낙동강 변 농지는 흡사 호수처럼 물 천지가 되었고, 딸기 모종 농사 등은 몽땅 망쳐졌다.
설상가상 그 이듬해 태풍 매미가 다시 용당리를 덮쳤다. 추석 연휴기간에 태풍 ‘매미’가 할퀴고 간 피해의 흔적은 너무도 컸다.
다음은 양산시민신문(2003년 9월 20일자)의 기사내용이다. 기사의 내용이 다소 길지만 용당지역이 태풍 매미로 입은 참담함 피해를 잘 보여주기 때문에 인용해 본다.
“언제 태풍이 왔다 갔는지 모를 정도로 쾌청한 날씨와 양산의 피해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소문만 듣고 편안한 마음으로 원동 방면 지방도 1022호선로 들어섰지만 태풍의 참상은 거기서부터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5분 남짓 원동 화제로 들어가는 도로변에는 태풍으로 기울어지고 넘어진 전신주와 뿌리째 뽑혀 넘어져 있는 아름드리나무들, 붉은 흙탕물이 되어 무서운 기세로 흐르고 있는 낙동강 저편의 김해 상동면의 공단지역도 물에 잠긴 채 건물들만 물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점차 태풍 ‘매미’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실감이 갔다. (중략)
‘매미’가 상륙했던 12일부터 비상근무를 하고 있는 공무원들과 주변 주민들로부터 14일 현재까지의 상황들을 받아 적으면서 이틀 사이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음이 느껴진다. 13일 오후에는 용당리 ‘가야진사’ 근처에 딸과 함께 고립되어 있던 한미자(36) 씨가 강 건너 김해 쪽으로 살려달라고 소리쳤고 김해 상동 여차리 사람이 듣고 김해경찰서 상황실을 거쳐 양산경찰서와 양산소방서 119에 접수, 소방서 구조대원들과 공무원들이 보트를 타고가 고립되어 있는 부녀를 구출했다는 가슴 뭉클한 사연도 들었다. (중략)
보트마다 라면과 생수를 싣고 고립되어 있는 용당들(당곡, 신곡, 중리)로 가기 위해 배에 올랐다. 낙동강 물이 역류해 들어오고 용당들에 둑이 터져 온 들이 물바다로 변한 상황에서 그 많았던 딸기 하우스는 찾을 길이 없었고 나란히 서있는 전봇대만이 그곳이 길이라는 걸 짐작케 할 뿐이었다. 배 위에서 바라보는 용당들은 차라리 물속에 잠겨 고요하다. (중략)
신곡에서 하선하여 다시 걸어서 철길을 따라 피난민 행렬처럼 상·하행선의 열차를 피해가며 1.5㎞를 걸어 고립무원의 중리마을에 도착했다. 13일 오전 3시부터 침수가 된 중리마을 주민들은 57세대 180여명의 주민이 음식과 물을 나눠 마시며 견디고 있다.”
이러한 피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자 마을사람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원동면 용당리 당곡, 신곡 등 5개 마을 31가구가 침수되고 농경지 128㏊가 물에 잠겼다. 주택 20동도 전파되거나 반파되고 42개 업체의 공장건물 지붕이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특히 낙동강의 범람으로 원동면 용당리 딸기 시설하우스 재배단지 85㏊가 물에 잠겨 11억 원 상당의 딸기 모종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또 이렇게 홍수가 한 번 나면 가옥과 비닐하우스 파손뿐, 또는 그렇게 힘들게 심어놓은 딸기모종이 삽시간에 사라져버리는 것도 큰 문제지만 이것은 한 해의 피해로 그치지는 않는다. 수해 복구로 인하여 딸기 모종을 늦게 심게 되면 수확이 그만큼 늦어져 농민들이 입는 경제적 고통은 이중 삼중으로 다가온다.
홍수 피해를 입었을 경우 정부에서 피해보상비를 지원해 준다. 매미와 같은 큰 수해를 입었을 때 재난지역으로 해당이 되면 크지는 않아도 돈이 지원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된다. 수해에 대비해서 보험을 들고 싶지만 또 그럴 수 없는 현실이다. 이는 작물에 대해서 피해의 많고 적음을 정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당곡마을 이장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는 주로 딸기나 수박농사를 짓는다. 철길 너머 쪽에서 이것을 하는데 태풍 같은 것이 오면 거의 모든 지역이 침수된다. 강 옆이라서 홍수가 자주 든다. 작년에는 홍수가 나지 않았다. 수박 철에 홍수가 나면 모두 다 버려야 한다. 이곳의 농민도 수박을 수확할 때만 되면 홍수가 날까 두려워한다. 그래도 달로 보면 홍수가 나기 전에 수박 철이 끝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안심을 한다.”(최대오, 당곡마을 이장, 71세)라고 하신다.
주민들은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겪어야 하는 물난리가 진절머리 난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대부분 낙동강 수계에는 제방이 되어 있지만, 중리마을, 당곡마을, 신곡마을에만 제방이 없어 매년 침수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해 있다.
농사를 안전하게 지을 수 있도록 제방을 만들어 주든지 아니면 아예 정부에서 사유지를 구입해야 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제방을 만들어 달라고 국토관리청에 건의했지만 강폭이 1㎞가 안되면 제방을 쌓을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용당들 사람들이 매년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규정만 가지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항상 홍수에 대한 아픈 기억을 머금고 살아야 되는 마을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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