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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리의 땅이름 내력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B010102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지산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기혁

현재의 지산리는 지산, 평산, 서리로 나누어져 있다. 지산리의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통도사를 빠트리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먼저 통도사와 관련하여 남아 있는 지명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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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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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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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옛날 평산의 옛 이름은 부도골(혹은 부뒤골)이었는데, 이것은 부도(스님들의 사리를 모시고 있는 탑)가 있는 뒷마을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부른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국사당을 중심으로 본 서리마을을 본앞마을, 지산마을이 당뒤마을로 불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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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당

지산마을은 스님들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마을이 유지되어 가구 수에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스님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평산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과거 일제강점기에는 스님들이 대처(결혼을 하다)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처승들이 그 가족과 함께 평산에 살았다. 스님들이 많이 살게 되자, 그들을 돕는 일꾼이나 아낙네들을 필요로 하게 되어 이 사람들 또한 평산을 생활 거처로 삼게 된다. 이 과정은 절 밑에 생겨나는 마을, 곧 사하촌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시절 실제 가구 수는 평산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남아 있는 통계로는 지산이 103호, 평산 53호, 서리 48호로 지산이 가구 수가 가장 많다. 이 이유는 스님들이 사는 가구는 통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마을이 생겨나는데 큰 영향을 미친 통도사는 마을의 시작뿐만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지산리와 여러 가지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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