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B02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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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평산마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종봉 |
지금은 승려의 세계와 일반인들의 세계가 구분되어 있지만, 과거 일제강점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의 이곳 지산리는 승려의 세계와 일반들의 세계 즉, 승속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승려가 절 이외에도 마을에 와서 생활하고, 마을 사람들이 절로 들어가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승려는 지금의 승려와는 다른 대처승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처승은 결혼한 승려를 말하는데, 이들은 결혼을 하였기 때문에 부인을 두고 있었다. 이들 부인들은 먼 곳에 거주하였던 것이 아니고, 절의 가까이 마을에서 많이 생활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통도사에도 대처승이 존재하였다. 그리하여 통도사 근처의 마을인 지산리 또한 대처승의 부인들이 많이 생활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대처승이 마을에 오면 마을에서 살 수 있도록 땅을 주었다. 한편 마을의 남자들이 승려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지산마을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지산마을의 남자 중에서도 승려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이 승려, 대처승이 되자 자연히 부인을 맞아 들였다.
승려는 절에서 생활하기도 하고 지산의 집에서 생활하기도 하는 이중의 거주 공간을 가지게 되었다. 대처승의 존재는 이곳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많은 사찰에 소위 ‘대처승’이 존재하였다. 이곳 지산도 그러한 대처승의 삶이 서려있는 지역 중 하나이다.
승려가 된 이들 중에는 사찰 소유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거나 하여 지식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해방 이후 불교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그리하여 불교계의 정화작업으로 승적(스님들 증명하는 것)을 정리하면서 소위 대처승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자연히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승려의 부인들도 정리되었다.
해방 이후 이곳도 승려의 세계와 일반인의 세계(승속)의 구분이 없던 곳에서 승속의 세계가 분리된 마을로 변화하였다. 이제 대처승의 모습은 찾아 볼 수는 없지만 이 지역의 대처승에 관한 일화로 인해 그때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평산마을에서 대처승의 일화를 들을 수 있었다. 산마을은 일제강점기에 스님들이 살았던 마을이었다. 조선시대에 우리나라에 쳐들어 온 일본인들은 스님에게 많이 당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사람들이 이 마을에 쳐들어 왔었는데, 산 너머 암자에 살고 있는 스님들이 그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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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마을
이에 화가 난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불교 전통을 없애기 위해 스님들을 결혼시켰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불교 내용을 보면 승려는 결혼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와는 달리 모든 승려들이 대처승이다.
이에 일본은 우리나라의 불교 전통을 없애고 자신들의 불교문화인 대처승으로 만들기 위해 승려들을 결혼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불교 전통의 뿌리를 흔들고 일본인들의 색채로 물들이려 했던 것이다. 평산마을도 그러한 세월의 역사를 겪고 살아온 마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