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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식당 사장님이 된 도시 처자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B030202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엄원대

너더댓 살 적 얘기니까 쉰 네 해를 산 강미애(54세) 씨 자신의 연륜을 놓고 볼 때 참으로 오래 전의 일이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새하얀 고무신 한 켤레를 사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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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애씨

그런데 문제는 그 신발이 강씨의 발보다 작았다는 것이다. 어머니께서 다음 저자 날 바꿔다 주신다는 걸 행여 자기 것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어린 마음에 작지 않다고 우기고는 그걸 신고 종일 밖에 나가 자랑하며 놀다가 집에 와 보니 물집이 생겼더란다.

그것을 어머니께서 탱자나무 가시로 따 주셨는데 그 이후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오른쪽 다리 전체가 퉁퉁 부어올랐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약이 없을 때인지라 부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사타구니에 쑥뜸을 놓는가 하면 비누와 밥을 섞어 바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차도는커녕 부기는 더욱 도져갔다.

▶ 울산서 태어나 부산에 양녀로 간 사연

그러는 사이 어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예순에 얻은 어린 막내딸이 행여 새로 들어온 며느리에게 구박받지나 않을까 싶은데다 마침 부산서 한의원을 하는 집에서 양녀를 구했으므로 병도 고칠 겸 해서 초등학교 2학년 때 부산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로써 성씨도 현씨에서 강씨로 바뀌게 되었다.

▶ 반티장수에서 어엿한 식당 사장님 되기까지

혼기가 되었을 무렵 이 마을에 살았던 이모네 댁에 놀러왔다 지금의 남편 눈에 들게 되었단다. 강씨 말에 의하면, 당시 부군 정정복(55세) 씨는 농촌 총각 신분으로서는 장가가기가 힘들 것으로 판단해 순전히 장가가기 위해 양산읍내에 있는 ‘롯데칠성’에 다니고 있었단다. 그러나 그는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해서 도시처녀의 농촌생활은 시작되었다. 결혼 당시 시댁의 재산은 논 10,000㎡, 밭 2300㎡로 결코 적지 않은 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농한기에는 말 그대로 농한기여서 소득원이 전혀 없었다. 그 사이 얻은 두 아이를 키우는데 적잖은 돈이 들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용돈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도회지에서 살아온 강씨로서는 일 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목욕을 해야 하겠는데 그 목욕비조차 없었다고 한다.

절약 이외에는 달리 살아갈 방법이 없었던 때에 시어머니께서는 아침에 쌀독의 쌀 표면에 손바닥으로 도장을 찍어두었다. 그러면 강씨는 저녁밥 지을 쌀을 넉넉하게 미리 퍼 낸 뒤 저녁밥만큼의 쌀은 미리 물에 불려둠으로 해서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고 남은 쌀을 모아뒀다가 내다팔아 목욕비로 썼다.

용돈이 궁하기는 마찬가지였던 남편은 소를 키워도 보고, 멧돼지도 사육해 보는 등 부단한 시도를 했다. 그러나 소는 때마침 일어난 한우 파동으로 실패했고, 멧돼지는 야생의 동물을 좁은 우리에 가둬 사육하다보니 운동량 부족으로 마비 증세를 보이면서 성장을 제대로 하지 못해 역시 실패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강씨는 임신 8개월의 몸을 이끌고 통도사 산문 앞에 나가 콩국 장사를 시작했다. 이후 강냉이·오이·마늘·열무 등 닥치는 대로 내다 팔았다. 열무 스무 단이면 대략 40㎏ 정도가 되는데, 이를 이고 십여 리나 되는 극락암 앞까지 가서 팔기도 했다. 아무리 무거워도 중간에 쉴 수조차도 없는 것은 머리에 인 것을 내려놓기도 어렵거니와 남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다시 머리에 일 수 없는 무게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무리를 한 것 때문에 지금도 만성적 요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도 옥수수 장사에서는 하루 5만원까지도 벌어들여 상당한 재미를 보기도 했단다. 스물 다섯에 시집와 스물 여덟부터 마흔 여덟이 될 때까지 이십년이 넘도록 반티장사(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하는 장사)를 하다 보니 나중에는 정수리의 머리카락이 닳아 원형탈모증에 걸린 사람처럼 되더란다.

처음 산문 앞에서 장사할 때 남편이 남들 보기 민망하다며 그만 두라고 했다. 그때는 차라리 자신에게 대한 사랑 때문이기도 했겠기에 참을 만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다니던 둘째가 친구들 보기 창피하다고 인사를 안했을 때는 이게 아니다 싶어 그날로 노점상을 그만 뒀다.

그래도 일까지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등산객들이 자주 왕래하는 길목에 있는 마을 땅 500㎡를 연 100만원의 사용료를 내고 임차해서 닭요리 전문 식당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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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요리 전문 식당

자식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집안에서의 장사인 식당 사장님이 된 것이다. 위치도 괜찮았던 데다 토종닭과 자신의 밭에서 직접 재배한 푸성귀를 재료로 하였고 상호조차 ‘촌닭집’으로 했던 것이 주효했다.

1989년부터 시작한 식당이 잘되어 두 아이들의 대학 학자금도 수월하게 마련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단골손님도 제법 많이 생겼기에 이를 밑천으로 2001년에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마을 안에 있던 집을 팔아 목 좋은 지금의 땅에 번듯한 식당을 차렸다. 이제는 어디에 나가서도 당당할 수 있는 진정한 식당 사장님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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