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C01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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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기혁 |
6·25전쟁에서 한국군은 북한군에 의해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려나게 되어, 결사항전지역으로 맞붙었던 곳이 바로 낙동강 전선이었다. 양산은 낙동강 하구에 해당되는 지역이므로 이곳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사람들은 전쟁이라고 하면 서로 총을 겨누며 살생만 한다고 생각하여 군인들의 희생만 언급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민간인에게도 큰 피해를 주게 된다. 그래서 지금도 마을사람들에게는 6·25전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만큼 이곳 사람들에게는 아프고 참담한 기억으로만 남겨진 전쟁이다.
율리마을에 들어왔던 북한군은 크게 두 부류라고 한다. 첫째는 북한군이 남진하면서 들어온 부류이고 두 번째는 대물림하는 찌든 가난이 싫어서 북한군에 합류한 머슴 등과 같이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보급로가 차단되자, 생존을 위하여 산으로 들어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들을 빨치산(partisan)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거의 매일 밤마다 식량조달을 위해 마을로 내려왔다. 그들의 주식인 쌀은 무겁기 때문에 이것을 많이 가지고 산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들은 매일 매시간 도주를 준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그들은 보통 열 명 전후로 내려왔고 무기로 따발총을 소유한 사람은 두어 명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는 모두 죽창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 무기가 적은 탓도 있었겠지만 죽창은 쌀을 운반하면서 지팡이로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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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창
특히 정미소를 운영하는 집이 입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마을사람들은 증언에 의하면, 당시 동래정씨 집안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는데, 그 집이 산자락에 있는 외딴집이어서 이 집에 빨치산들이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 정씨 집안에는 혼기를 바라보는 누님이 있었기 때문에 정씨의 부모들은 이 누님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빨치산의 요구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빨치산이 내려오면 아버지 정씨는 말없이 창고 열쇠를 건네주었고, 그들 또한 적당량의 쌀을 챙긴 뒤 열쇠를 되돌려 주고는 순식간에 뿔땅꼴[불당골(佛堂谷)]로 숨어 들어갔다.
또 정미소 운영자인 정씨는 당시로 보면 큰 부자이었음에도 크게 해를 당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평소에 머슴들에게 박절하게 대하지 않아서 무탈하게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씨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그 다음이었다.
당시에는 마을마다 순사(경찰)가 한 명씩 파견되어 그 마을의 청년 열 명 정도를 자치대원으로 선발한 뒤 자신이 소대장이 되어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 순사는 빨치산이 내려올 즈음에는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도 않다가 낮만 되면 나타나 이들을 도왔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뇌물을 챙겨가곤 했다.
제대로 훈련 받은 일이 없는 열 명의 대원들을 거느리고 혼자 힘으로 빨치산과 대적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긴 하겠지만, 힘없는 백성은 설상가상으로 힘들게 하는 순사가 오히려 더 무서웠다고 한다.
이런 생활을 일 년도 훨씬 넘게 했을 무렵, 오늘날 양산고등학교 자리에 백골 872부대가 주둔하게 되었고, 곧이어 소토에도 1개 소대가 상주하게 되면서 밤마다 뿔땅꼴에서는 따발총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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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 872부대가 주둔한 곳
따발총은 한 발씩 쏘면 ‘딱콩’ 하는 소리가 나는데, 연속 발사를 하면 ‘딱딱딱콩콩콩’ 하는 소리가 났다. 주민들은 뒷산에 있던 빨치산이 전부 없어질 때 까지 1개월 남짓 이 따발총 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