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E03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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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엄원대 |
나하용(60세) 씨는 올해(2008년) 환갑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곧장 양복점에 취업했으니 50년이 다된 셈이다. 상북이 고향인 그가 처음 양복가게에 발을 들여놓았던 곳은 부산 동대신동 어느 집이었다. 너나없이 가난하던 시절 호구지책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잔심부름에서 시작하여 단추달기, 주머니달기로 이어진 뒤 9개월 만에 바지를 만들게 되었다. 그나마 보통 사람들보다 2~3개월 빠른 입문이었다. 말이 잔심부름이지 그때가 제일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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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용 씨
영하 11도씩 내려가는 대신동 골목의 칼바람을 맞아가며 숯불에 부채질하느라 눈물 콧물 흘려가며 무쇠다리미를 달궈다 주면 고참들은 그 다리미를 찬물에 넣어 물을 데워 쓰는데 사용함으로써 순식간에 차가워진 다리미를 다시 달구느라 다시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연기에 눈이 매워 흘리는 눈물만이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눈물도 함께였다. 그러면 송곳이 날아오고 회초리가 날아왔다. 때리다 회초리가 부러지면 다시 울면서 자신이 맞을 회초리를 사와야 했다. 잠은 옷감을 재단하는 테이블 위에서 잤는데 유담뽀(ゆ湯婆: 뜨거운 물을 넣어 추위를 가시게 하는 물결 모양의 양철로 된 통의 일본말) 하나가 유일한 난방 기구였다. 어느 날 밤에는 뜨거운 물이 새어나오는 바람에 다리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그래도 한 달에 두 번 쉬었는데 그때마다 500원의 연금이 주어졌다. 그때 돈 500원이면 목욕하고, 밥 먹고, 영화까지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 옷 만들기를 가르치는 곳은 크게 두 종류였다. 교복을 중심으로 하여 남방 등을 만드는 곳과 정장 슈트를 만드는 곳이었다. 나 씨는 전자를 택했다. 기성복이라는 것 자체가 없던 시절이라 어떤 종류의 옷이든 만들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6·25 전쟁 뒤에는 양복감 자체가 없던 때라 미군들이 입던 ‘사지’ 군복을 자갈치저자에서 염색 해다 ‘우라까이(닳은 무릎, 팔꿈치 때문에 옷을 뒤집어 다시 만드는 것을 일컫는 일본말)’해서 입었다. 그 당시, 나씨는 수영복도 만들어 봤다고 한다.
지금 양산에는 맞춤 옷 가게가 세 집밖에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게 되면서 체형도 표준화가 되어서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는 맞춤복을 찾지 않게 된 때문이다. 2·4·6의 짝수로만 나오던 기성복이 1·2·3·4로 나오게 되면서 소비자들 개개인의 체형에 더욱 맞는 옷이 나오게 되면서 맞춤옷의 설 자리는 자꾸 더 좁아진 것이다. 나씨는 발로 움직이던 것을 전동화한 30년 넘은 오바로크(옷감에 가위질한 부분의 실이 풀어지지 않게 바느질 하는 것) 미싱 등 세 대의 재봉틀을 가지고 수선 일을 주로 하면서 태양복장사라는 간판을 걸고 가게를 꾸려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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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