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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다시 새롭게 하려는 새마을 지도자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A040201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중리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종락

중리마을 새마을 지도자 박상철(47세) 씨의 하루 일과는 경부선 철길 건너 낙동강 변에 있는 일터로 나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딸기를 막바지 수확하고 있고, 그 뒤를 이어 지을 수박농사를 위해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비닐하우스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중년 농부의 건장한 체구와 구릿빛 얼굴이 강한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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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철씨

박상철 씨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아들 셋, 이렇게 3대가 함께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지키며 오붓하게 살고 있다. 첫째 아들은 군복무중이고 둘째는 고등학교 2학년, 늦둥이 막내는 초등학교 2학년이다. 그는 선친 때부터 짓던 딸기농사의 대를 이어가고 있다.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입학할 때쯤부터 선친이 지으셨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딸기농사를 지은 햇수를 합하면 40년 가량 된다. 본인이 지은 것은 19년째이다.

용당리 딸기 작목반은 모두 80명 정도인데 그 중 중리마을은 30여 명이다. 중리마을 작목반은 중심층이 50대여서 그가 속한 40대는 적은 편이지만 젊은 사람들의 기술은 경험이 많은 분들과 비교해서 어느 수준까지 도달했다고 자평한다.

올해(2008)는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설향(논산 3호)과 유럽종 찰리를 재배했다. 작년에는 장희를 심었는데 수해에 피해가 커서 올해에는 향이 진하고 경도가 좋은 찰리를 많이 심었다. 늦게 심으면 수확량이 감소하기 때문에 8월 중순부터 9월초까지가 정식(定植) 적기이지만 재배지가 저습지다보니 홍수 피해를 줄이기 위해 9월 중순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 객지생활 뒤의 고향농사

박상철 씨는 어릴 때부터 짓궂은 행동을 많이 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는 실수로 이웃 할머니에게 화상을 입힐 뻔하여 아버지께 크게 혼난 기억도 있다. 양산고등학교(구, 양산종합고등학교) 원예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 영농학생회장을 맡아서 공부와 실무를 열심히 익혔다.

그러나 졸업 후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도 마시고 싸우기도 하고 남의 집 대문을 걷어차는 등의 돌출행동을 하기도 하며 꽤나 부모님 속을 썩였다. 급기야 나가서 네 밥벌이나 하라고 하시는 아버지에게 내쫓기다시피 하여 집을 나오면서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국제상사를 시작으로 상원약품, 제대 후에는 남아통신에 근무하기도 했다. 영업직으로 근무하면서 거래처 직원을 만나거나 친구를 만나는 일이 많아지고, 술 마시는 기회가 잦아졌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마음과 몸이 피폐해지는 것 같아 그런 생활을 청산해 보고자 결심한 끝에 영업직을 그만두고 양산에 있는 고려강선에 입사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하여 허리를 다쳤는데 그 후유증이 심해져 결국 5년 7개월간의 직장생활을 그만 두고 석계에서 부식을 곁들인 구멍가게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늘 마음 한구석에는 빈자리가 생겨 머리를 혼란하게 했고, 일은 일대로 하는데 수입은 뜻대로 들어오지 않아 몸과 마음이 늘 피곤했다. 우선 구멍가게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심한 끝에 고향에서 농사를 짓기로 결론을 내리고 아내에게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아내는 찬성했다. 고마웠다. 고향에 가면 집도 있고 땅도 있으니 이보다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사는 전혀 낯설지가 않은 터였다. 군대 3년, 직장생활 7년 등 10년의 객지생활을 청산하고 1990년 초,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때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였으므로 아버지가 하시던 딸기농사와 수박농사를 이어나가 고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1990년대 초에는 연 순수익 2천만 원을 올렸는데 직장생활 할 때보다 나았다.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셋방살이 하면서 생활비 제외하고 1년에 3백만 원을 모으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4년 정도 열심히 농사일을 하여 소득을 올리다보니 조금씩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3.3㎡당 10만원을 들여 1,980㎡에 자동화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예산을 초과하는 바람에 빚을 졌는데 공교롭게도 그해 수해로 피해를 입으면서 그 빚을 갚지 못하고 말았다.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남겨진 네 명의 동생들 대학공부와 결혼 다 시키고 경제적으로는 크게 어려움은 없어 그 정도의 빚은 차츰 갚아지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막내아들이 태어나던 2001년, 4천만 원 보증을 섰던 것이 잘못되어 그것을 떠안을 처지에 이르는 사건이 생겼다. 그것이 내리막길로 치닫는 결정적인 이유가 될 줄이야. 원래 있던 빚과 동생 결혼 비용으로 썼던 약간의 빚, 거기다가 연대보증채무로 생긴 빚, 해서 갚아야 할 돈이 금세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사람을 향한 배신감과 함께 부담감까지 겹쳐 삶을 포기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인가 하는 허무감도 드는 한편 보증을 부탁했던 이에게 복수를 해야겠다는 증오심도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 후 당사자는 급성간암으로 사망하고 그가 재산을 은닉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다시 술로 세월을 보내며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기한내 돈을 갚지 못하면 은행에서 압류가 들어올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기 전에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피해가 갈 것이 뻔했다. 늦둥이가 태어난 이후 최대의 시련의 시기가 바로 그 때였다. 아니 일생 일대 최대의 고비였다.

▶ 절망 속에서 새 출발한 농사

며칠이 지난 저녁, 아내를 불러 도저히 자신은 회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 다른 곳으로 가서 아이들을 키우며 살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아내는 “아직까지 땅이 압류된 것도 아니니 다시 한 번 시작해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참으로 고마웠다. 기실 그의 아내는 도시에서 자라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남편을 도와 농부의 아내로 생활해 왔기 때문이다. 아내의 그 한마디가 큰 힘이 되어 용기가 생겼다. 재기할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다시 시작하기로 굳은 결심을 했다.

이보다 더 밑바닥은 있을 수 없었다. 그에겐 악만 남아 있었다. 농협에 찾아가 저리자금으로 연기해 달라고 사정하고 다시 빌린 돈으로 딸기 모종을 사서 심고, 비록 원금은 갚을 형편이 되지 못했지만 이자는 꼬박고박 갚아 나가며 연체는 하지 않았다.

철길 아래로 터널이 생기면서 농사짓기도 편해졌다. 우연한 기회에 공개매각을 해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마을 땅 660㎡를 사 들였다. 동생이 결혼하게 되면서 결혼자금을 마련하고자 알아보니 당시 토지 붐이 일면서 땅값이 구입할 때보다 2배 이상 올라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 땅과 자신이 소유한 땅을 합쳐서 매각한 돈으로 동생 결혼자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부채를 갚기도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그 해는 농사도 상당히 잘 되어 1억 원 가량의 부채를 더 갚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족의 사랑과 믿음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아내가 자신을 믿어준 것에 감사하고 있다. 동생들은 모두 결혼하여 나름대로 제 일에 충실하며 사회적으로도 자리를 잡아 잘 살고 있다.

누군가 “딸기는 14개월 농사”라고 했다. 모종을 심고 수확하기까지를 1년 주기로 본다면 딸기는 한쪽에서는 수확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모종을 키워 다음 해 농사를 준비하는 중복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박상철 씨는 모종을 사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려 직접 모종을 키우고 있다.

딸기와 수박농사는 고소득이 보장되는 반면에 고비용이 수반되는데, 품종선택과 수확하기까지의 철저한 관리와 질 높은 열매를 맺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수익이 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고 한다. 이에 따라 그는 항상 연구하고 노력하는 자세를 견지하며 부농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박상철 씨는 현재 중리마을 새마을 지도자와 원동면 자율방범대장을 맡아 봉사를 펼치고 있다. 3년 넘게 마을 주민들의 농기계를 직접 고쳐주며 지난날 돌출행동으로 인한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으려 노력한 것이 계기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이장을 도와 마을일을 거들고 있으며, 면내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 시 119와 함께 구급활동을 하기도 하고, 면 단위의 큰 행사와 가야진 용신제 등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교통정리 맡아 지역을 위해 일하며 몸소 봉사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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