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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 출신으로 일제에 저항한 인물들. 양산 지역에서의 본격적인 항일 독립 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양산 지역에서는 인근의 밀양이나 울산 지역에서처럼 3·1운동을 주동적으로 이끈 비밀단체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윤현태와 같은 선각자들이 조선국권회복단에서 활동한 만큼 윤현태의 영향을 받은 지인과 후배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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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강재호는 유년 시절 윤현진으로부터 항일 정신을 배웠다. 이후 1919년 3월 27일 양산군 양산읍에서 장이 선 날을 이용하여 엄주태, 박삼도, 전병건, 정주봉 등과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강재호는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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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일본 센슈[專修]대학 법과에 재학 중이던 1942년을 전후하여 항일 민족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의 주장은 일본은 반드시 패망할 것이므로 일본이 패전하여 혼란기에 봉착했을 때 봉기하여 독립을 완수하자는 것이었다. 궐기한 민중을 지휘하여 방화·진화·방해·교통 노선 파괴·식량 창고 소각 등의 세부 계획 등을 설정해 놓고 활동하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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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서울 유학생 도진호로부터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학생 강재호 등과 함께 1만 매를 인쇄하여 전국적으로 배포할 때 김경환은 경상북도 선산·상주 지역에서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았다. 이에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에 입단하였다. 그러다 박장호 휘하에서 번시후[本溪湖] 총관으로 임명을 받아 활동하였다. 그 후 지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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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승려. 양산 통도사 주지, 명성학교 설립자, 원종 총무원 인사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동아불교회 회원으로서, 통도사의 군자 의연금을 독자적으로 출연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김구하는 자신의 논 19.8348m²을 처분하여 안창호의 밀사에게 5,000원, 백초월에게 2,000원, 월정사 이종욱에게 3,000원, 독립운동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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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덕봉은 1919년 9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각지의 부자들에게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동시에 한쪽 면에는 태극기와 ‘독립 기념’이라 새기고 다른 한쪽 면에는 ‘민국 원년’이라 새긴 50전짜리 은메달을 건네는 대가로 군자금을 모집하던 김두현(金斗鉉)·김두옥(金斗玉)의 지령을 받아 활동하였다. 또한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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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32년 김시학·성상호 등과 공모하여 1932년 5월 1일 노동절을 기해 부산 시내 노동자를 선동하여 시위를 감행하기로 한 뒤, 1932년 4월 27일 부산불교학원 내에 있는 등사판을 절취하고 격문 300장을 등사하여 부산 지역에 살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1932년 8월 1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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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말복은 조국의 광복에 헌신하고자 신학문을 배우며 항일 민족 의식을 키웠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통도사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한용운(韓龍雲)의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사』 및 『님의 침묵』 등의 저서를 읽었고,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전수학교를 거쳐 1936년 동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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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9월경 중앙학림을 졸업하고 『혁신공보』를 발행하다가, 의용승군·대동단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민오로부터 대동단의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동지 10여 명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9년 10월 1일 대동단으로부터 경부선·연변 제2차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라는 위임장과 함께 『독립신문』 7부, 경고문 5부, 인민 봉기 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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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범어사 승려로서 김법린, 김상헌 등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다시 범어사로 돌아와서 3월 18일 범어사 만세 운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1919년 4월 2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감형되어 1920년 1월 29일에 출옥하였다.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로 전향하였는데, 일명 김일성으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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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상기(金相琦)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당시 범어사 지방학림의 학생이었다. 당시 범어사에는 초등학교 과정의 명정학교(明正學校)와 중등학교 과정의 지방학림(地方學林)이 있었다. 한편 서울에서 거족적인 3·1운동이 계획되면서 불교계의 민족 대표 한용운이 양산에 내려와서, 주지 오성월(吳星月) 등과 만나 독립 만세 운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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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1운동 당시 범어사 지방 학림 학생으로서, 한용운의 밀지를 받아 통도사에 내려온 오택언과 함께 신평 만세 운동을 모의하였으나, 3월 7일 밀고로 인해 오택언이 압송당했다. 하지만 김상문은 예정대로 3월 13일 신평 장날 하북면 줄다리기 대회를 빙자하여 신평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때 함께 만세 운동을 주도한 김진옥은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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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8년 불교학교인 중앙학림(中央學林) 학생으로서 민족 사상 고취 및 불교 연구를 목적으로 한 유심회를 조직하여 신상완(申尙玩)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김법린, 정병헌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유심회는 같은 해 11월 한용운의 지도를 받으면서 민족 운동 단체로 발전되었다. 1919년 2월 말에 한용운의 지시로 상경하여 「독립선언문」을 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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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범어사로 출가하여 지방학림을 졸업하였다. 이후 불교 전문 강원을 다니면서 서울에서의 3·1운동에 범어사 대표로 김법린, 김상헌, 차상명, 김상기, 김한기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8일 범어사 만세 운동 때 주동자로 체포되었다가 연행 중 차상명과 탈출하였다. 다음날 다시 만세 의거에 참여한 후 동래경찰서에서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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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1912년 양산군 동면 석산리에서 태어난 김외득은 서울 보성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1930년 3월 만세 시위 운동을 펼쳤다. 이 사건으로 구류 15일을 선고받고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귀향하여 1931년 4월에 조직된 양산농민조합에 가입, 소년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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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20년 진주농림학교 2학년 재학 중 기숙사 학생 48명으로 구성된 토론 연구회의 회장을 맡아 3·1운동 당시의 진주 읍민과 진주농림학교 학생들의 활약과 항일 독립 사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1920년 5월 29일 동급생 문위동(文渭東), 신영안(申英安) 등과 모의하여 제2차 진주 독립 만세 운동을 1920년 8월 30일 천장절(天長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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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인규(金麟圭)가 동래중학교 5학년이던 1940년 11월 23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부산 제2상업학교 및 동래중학교의 학생 1,000여 명이 참가했는데, 일본인 심판진의 편파적인 판정으로 일본인 학교가 우승을 차지하자 분노가 폭발하여 당시 금지곡이었던 「아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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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28년 3월 23일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4월 4일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소년부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3월 16일 구속된 양산농민조합의 간부를 탈옥시키기 위해,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의 주동자 전병건(全秉健)의 지령에 따라 300여 명의 조합원을 동원하여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검거되었다. 193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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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대한독립단에서 함경도로 특파된 박경구 등과 함께 함경남도·함경북도를 한 구역으로 하는 대한청년단 연합회 함경도 의용대를 조직하여, 연락·군자금 모금·단원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1년 2월 7일 공갈 혐의와 출판법 위반으로 함흥경찰서에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2월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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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서울에서의 3·1운동에 참여한 오택언(吳澤彦)이 한용운의 밀지에 따라 3월 5일 「독립선언서」를 지닌 채 통도사에 도착하여 승려·유림 등과 함께 거사를 모의하여, 3월 13일 신평 장터에서 장꾼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때 김진옥은 김상문(金祥文)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하다가 검거되어 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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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철수의 호는 청제(淸齊)이다. 기장초등학교 등을 거쳐 1913년 부산 제2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7월 일본 게이오[慶應]대학에 입학하여 유학생 모임인 재 동경 한국학생학우회에 가입하였고, 『학지광(學之光)』 발간에 참여하였다. 1919년 동경에서의 2·8독립선언에 대표위원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 윤창석, 서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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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31년에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에 최달수(崔達守) 등의 권유로 소년부에 가입하였다. 1932년 3월 15일 양산경찰서에서 ‘소작료 4할 결의’를 하였다는 이유로 조합원 간부 17명을 구류 처분하자, 전병건(全秉健)의 지시에 따라 16일 조합원 300여 명이 양산경찰서를 습격하였다. 김태근도 주동자 김장호(金章浩) 등과 함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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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형기는 1919년 1월부터 재경성 의학전문학교 대표들과 함께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운동을 위한 학생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이에 김형기는 각급 학교 대표들과의 모임을 통하여 학생들의 결속을 공고히 하였다. 2월에는 민족 대표 중 한 사람인 이갑성에게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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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7일 양산 장터에서 일어난 양산읍 만세 운동에 이어 이귀수 등과 함께 모의하여 양산읍 2차 의거를 주도하였다. 4월 1일 오후 2시경 2,000여 군중이 모여들자 유경문은 이귀수와 함께 군중의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양산군청과 헌병 분견소로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항의하였다. 일본 경찰의 공포탄 발사와 총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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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886년 박경영(朴瓊榮)과 김남이(金南伊)의 차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선리에서 태어났다. 1906년 심금순(沈今順)과 결혼하였으나, 사별한 후 최명이(崔名伊)와 재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1947년경부터 양산시 원동면 원동초등학교 앞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였으며, 1959년 1월 타계하였다. 박대희(朴大禧)는 일제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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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이만집, 이태련, 이영서 등이 주동한 3·1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8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깃발을 들고 시위행진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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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민오(朴玟悟)는 경성 불교중앙학림에 유학중이던 1919년에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20년에는 신상완 등과 함께 전도승려의용군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유력 승려를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파견시키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서울에서 김법린 등과 『혁신공보』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각지로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후 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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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삼도는 1919년 3월 12일 친구 엄주태가 부산 동래고보 만세 시위에 참가한 후 양산 지역에서의 만세 운동 시도를 제안하자 이귀수·정주봉 등과 함께 거사일과 거사 진행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에 1919년 3월 27일인 양산 장날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비밀리에 독립 선언서 200매와 공약서, 경고문 등을 등사하고 ‘대한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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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세민(朴世玟)은 1919년 3·1운동 당시 하북면사무소에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13일 하북면사무소 뒤편 신평 장터에서 통도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 공약서, 경고문 등을 배부하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하였다. 당시 박세민은 만세 운동 주동자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또한 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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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어려서 범어사에 출가하여 명정학교를 다닌 박영주(朴永珠)는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온 김영규·차상명 등 7명과 함께 범어사 자체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거사일을 1919년 3월 18일 동래읍 장날로 정했다. 예정된 날이 오자 1919년 3월 18일에서 다음 날인 19일 까지 이틀간 동래시장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이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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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임갑(朴壬甲)은 1902년 아버지 박도전(朴道銓)과 어머니 문지순(文池順)의 아들로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에서 태어났다. 1921년 양서경(梁瑞慶)과 결혼하여 양산시 남부동에서 정미소를 경영하였다. 1990년 서울시 성북구 안암동에서 타계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東萊高等普通學校) 4학년 학생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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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서상건(徐尙鍵)은 1915년 양산공보를 졸업한 후 1919년 3·1운동 직후 경성에서 『혁신공보』를 발행하던 박민오(朴玟悟)의 권유로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서상건은 대동단으로부터 제2차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라는 밀지를 받고 진주·하동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에 김덕봉(金德峰)·김봉길(金鳳吉) 등과 함께 1921년 5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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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서헌준(徐憲俊)은 1901년 10월 7일 경상남도 양산군 웅상면 매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일등 원종 훈신 서몽호를 선조로 둔 서헌준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났다.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 때는 기회를 얻지 못하여 행동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운동이 뜻하는 바를 안 서헌준은 이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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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손군호는 1901년 9월 24일에 경상남도 양산군 웅상면 평산리(현재 경상남도 양산시 평산동)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던 손군호는 신학문을 배워야만 우리나라도 문명화가 빨리 되겠다는 생각에 보통교육과정의 명정학교와 중등교육 과정의 지방학림이 있던 범어사를 찾아갔다. 집과의 거리가 수십 리 원거리이었기에 범어사에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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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신정균(申正均)은 중앙 불교전문학교와 일본 구택대학을 졸업한 후 1934년 4월 1일 양산 통도중학교 개교와 함께 교사로 임명되어 동양사·일본지리·영어·체조 과목을 담당하였다. 김말복·조병구·배기철과 함께 일제의 한국 강점의 부당성과 국제 정세 등을 교육하였다. 1941년 8월 31일 전라남도 선암사에서 온 유학생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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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심상옥은 경상남도 양산시 하서면 내포리(현 원동면 내포리) 사람으로 1919년 3·1운동 때 38세였다. 양산에서 독립 만세 시위가 일어나고 많은 애국 인사들이 체포되어 악형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순모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각지를 순방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였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회의에 보낸 소위 파리장서 사건에 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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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심상욱(沈相郁)은 1881년 아버지 심량택(沈亮澤)과 어머니 손경순(孫庚順)의 장남으로 양산시 원동면 내포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진옥(振玉)이고, 호는 우초(友焦)이다. 한학을 수학하고, 토곡산에서 은신술과 축지법을 통달하면서 수도하였다. 1911년 박민화(朴珉和)와 결혼하여 4남 1녀를 두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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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7일 경상남도 양산군 양산읍(梁山邑) 장날을 이용하여 엄주태(嚴柱泰)·김동건(金東健)·박삼도(朴三道)·정주봉(鄭周奉)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4월 22일 부산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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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안상수(安上水)는 1879년 아버지 안덕진(安德振)과 어머니 김재일(金在日)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29년 김순악(金順岳)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며, 1939년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교리에서 타계했다. 일제강점기 양산의 항일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양산농민조합의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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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양명호(梁明浩)는 1870년 아버지 양갑주(梁甲柱)와 어머니 오분출(吳分出)의 차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18년 김순등(金順登)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1946년 타계했다. 양명호는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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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양춘도(楊春到)는 1902년 아버지 양경률(楊敬律)과 어머니 고상남(高尙南)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내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범어사에 출가하여 명정학교를 다니면서 승적(僧籍)을 가졌다. 1937년 박무금(朴武今)과 결혼하여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양춘도는 1919년 3월 18일 동래시장 만세 운동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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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엄주태(嚴柱泰)는 1919년 3월 27일 전병건(全秉健)·박삼도(朴三道) 등과 같이 독립 선언문(獨立宣言文)과 경고문 등을 인쇄하여 배포할 것을 협의하고 200여 매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양산읍(梁山邑) 장날에 운집한 3,000여 민중에게 배포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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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엄주화는 1919년 3·1운동 당시 양산 지역의 독립 시위를 주도하였다. 1920년 양산 지역의 문화 진흥과 산업 진흥을 목표로 결성된 양산청년회에 김철수(金喆壽), 금석호(琴錫浩), 최학선(崔學鮮) 등과 함께 임원으로 참여하여 꾸준히 활동하였다. 양산청년회는 창립 직후부터 양산 지역 각 면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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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오택언은 1897년 6월 17일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중앙학림(中央學林)의 학생이었다. 1919년 2월 29일 오택언은 서울에서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인 한용운으로부터 독립선언문 3,000매를 받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배포한 후 군중을 규합하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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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농민조합 간부. 윤복이는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31년 4월 4일 양산농민조합이 결성되자 조합원으로 활동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일본인 및 한국인 대지주들을 압박하면서 소작 조건을 혁신하기 위한 맹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2년 2월 24일 제3회 농민조합회의에서는 경작권 확립의 건, 최저임금 제정에 관한 건 등을 결의하고,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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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수만(尹守萬)은 1931년 4월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에 항거하였다. 1932년 양산농민조합 구속 간부의 탈환 작전에 가담하여 조합원과 함께 양산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윤수만은 이 사건으로 검거되어 1932년 부산지방법원에서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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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현진은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명구(明九), 호는 우산(右山)이다. 7세 때 고향인 경상남도 양산 지역 만성재서숙(晩惺齋書塾)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5세 때인 1907년에 숙부 윤상은(尹相殷)이 설립한 구포의 사립 구명학교(龜明學校)를 1회로 졸업하였다. 17세 되던 1909년에는 중국의 난징, 베이징, 상하이 등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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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개득(李介得)은 1903년 아버지 이재영(李宰永)과 어머니 권보배(權寶培)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신기동에서 태어났다. 1929년 김복쇠(金福釗)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으며, 1973년 양산시 북정동에서 타계했다.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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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7일 제1차 양산의거에 엄주태 등과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 함께한 사람들은 대거 피검되었으나, 이귀수는 잠시 피신하였다가 류경문과 함께 제2차 양산의거를 모의하였다. 1919년 4월 1일 양산장에서 2,000여 군중을 동원하여 제2차 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양산군청과 헌병분견소로 진격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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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규린(李圭麟)은 1856년 아버지 이하찬(李夏燦)과 어머니 박용당(朴用堂)의 차남으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천면 석천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에 능통하여 유학자로 이름이 났다. 1927년 박수(朴銖)와 결혼하였으며, 1937년 양산시 주남동에서 타계하였다. 이규린은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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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규홍(李圭洪)은 1893년 아버지 이재영(李宰榮)과 어머니 김정숙(金貞淑)의 차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농(白農)이며, 자는 도숙(道淑)이다.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1913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으며, 1916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939년 5월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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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기주는 경상남도 양산 지역의 공립 원명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7년 선배인 윤현진에게서 감명을 받아 상경하여 3·1운동의 준비를 도왔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기주는 고향으로 돌아와 3·27 양산의거에 참여하였다. 1920년 양산청년회가 결성되어 김철수가 회장이 되고, 이기주는 간사장이 되어 고향 청년들에게 민족사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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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만춘(李萬春)은 1931년 4월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였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 구속 간부의 탈환 작전에 가담하였다. 이만춘은 조합원과 함께 양산경찰서 정문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경찰서로 진격하였다. 이만춘은 이 일로 검거되어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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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봉재(李鳳在)는 대구고등보통학교 5학년 때 공산주의자 장적우(張赤宇)에게 포섭되어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그는 사유 재산을 없애고 공산주의를 실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1927년 12월 대구부 남산정에서 평양형무소에서 출감한 고려공산청년회 경상북도 책임자 장적우 등의 강의를 듣고 신우동맹을 결성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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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3·1운동 당시 부산진 일신여학교와 동래고보의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양산 지역에서는 엄주태(嚴柱泰)의 주도 아래 이상환·엄주태·전병건(全秉健)·박삼도(朴三道) 등이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27일 양산장날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출동한 일경에 의해 엄주태·전병건·박삼도 등이 체포되었으나, 1차 시위 때 검거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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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석윤은 함경남도 안변군 문산면 사기리 석왕사(釋王寺)에서 승려 생활을 하였고, 호은대사(虎隱大師)의 제자였다. 1919년 5월부터 신상완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등사하여 배부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벌금형을 언도받았다.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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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원희(李元熙)는 1914년 아버지 이의문(李義文)과 어머니 류복금(柳福今)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다방동에서 태어났다. 1929년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산공립제2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1936년 서울의 대동상업학교(현 대동정보산업고등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한 후 1939년 조복조(趙福助)와 결혼하여 5남 1녀를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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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희우(李禧佑)는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였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 구속 간부의 탈환 작전에 가담하였다. 이희우는 다른 조합원과 함께 양산경찰서 정문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경찰서로 진격하였다. 이희우는 이 일로 검거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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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임수만(林壽萬)은 1903년 아버지 임갑이(林甲伊)와 어머니 김소임(金小任)의 아들로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에서 태어났다. 1928년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4년 조봉아(趙奉兒)와 결혼하여 2남 6녀를 두었으며, 1992년 김해시 삼방동에서 타계했다.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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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전혁이라는 별칭이 있다. 전병건은 엄주태 등과 함께 1919년 3월 27일 양산장날을 기해 일으킨 3·27양산의거를 주도하여 2년의 옥고를 치렀다. 1921년부터 양산청년회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제6회 총회 때 집행위원으로 피선되면서 양산청년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27년 결성된 양산청년동맹의 제2회 총회에서 집행위원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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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정선(旌善). 병한(秉翰)은 별명이고, 본명은 전병익(全秉翼)이다. 전병한은 1915년 3월 25일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는데(제3회), 엄주태(嚴柱泰)·서상근(徐相根) 등이 동기생이다. 엄주태·전병건(全秉健)이 주도한 양산만세운동의 모의에 동참하여, 1919년 3월 27일 양산장날을 기해 3,000여 군중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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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3일 부산진공립보통학교 교사 홍재문(洪在文)과 학생 배수원(裵守元) 등이 모의하여 부산 좌천동 거리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8일 부산진공립보통학교 학생 전봉호(全鳳浩)는 이갑이(李甲伊) 등 일신여학교 학생과 주민을 동원하여 좌천동 거리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때 전봉호는 주동 학생으로 검거되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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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전석준(全錫準)은 1919년 11월 백산 안희제의 주도하에 발족된 부산 기미육영회 평의원 감사역 등으로 활약하면서 후진 양성에 헌신하고 있었다. 이후 1920년 7월 15일 양산청년회 창립대회에서 의장을 맡아 회의를 주관하여 김철수를 회장으로 선출하는 등 양산청년회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1921년 4월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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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전이풍(田二豊)은 1920년에 조직된 양산청년회의 일원으로 활동해오던 중 1927년 신간회의 결성과 더불어 양산에서도 청년 운동 및 사회 운동 전반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할 즈음 이 지역의 주도적인 인물로 부상하였다. 1927년 6월의 긴급 총회를 통하여 양산청년회의 기존 간부들이 총사직함과 동시에 전이풍이 김기오(金基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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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규영(鄭圭永)은 1883년 아버지 정순용(鄭淳鎔)과 어머니 백아지(白牙只)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어곡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윤석(胤錫)이며 호는 낙산(洛山)이다. 한학을 배우고 낙산한의원을 경영하였다. 1909년 2월 변봉련(卞鳳連)과 결혼하였으며 부산에서 한의원을 경영하다 1959년 타계하였다. 묘지는 화룡 가마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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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기옥(鄭冀鈺)은 1906년 아버지 정재관(鄭在瓘)과 어머니 김복림(金福林)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났다. 1929년 이명련(李命連)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으며, 1999년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서 타계했다. 1932년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다 구속된 양산농민조합의 간부를 구출하는 작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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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주봉(鄭周奉)은 1901년 아버지 정갑룡(鄭甲龍)과 어머니 정아기(鄭兒其)의 아들로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21년 김갑선(金甲先)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한 이후인 1944년에는 배희이(裵喜伊)와 재혼하였다. 1959년 3월 30일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에서 타계하였다. 정주봉은 1919년 3월 경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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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진영(鄭鎭永)은 1916년 아버지 정원모(鄭原謨)와 어머니 박인수(朴因洙)의 아들로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에서 태어났다. 1931년 정순임(丁順任)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으며, 1982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에서 타계했다. 정진영은 1931년 4월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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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각 지역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 속에 청년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양산에서도 1920년 7월 양산청년회가 출범하게 되었고 정진호(鄭進浩)도 양산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 1926년 11월의 방향 전환론의 제창과 더불어 이듬해인 1927년 2월 15일에 신간회가 결성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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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의 독립운동가. 조병구는 일제시대 통도사에 있으면서 일본어 사용과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펼쳤다. 당시 통도사 종립학교였던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순지리의 통도중학교(지금의 보광중학교 전신)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의 역사와 국체를 부인하고, 우리민족사와 언어·문학 등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배일사상과 민족의식 앙양을 위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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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지용준(池龍俊)은 1894년 아버지 지재연(池載演)과 어머니 박치숙(朴致淑)의 막내로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범어사로 출가하여 지방학림을 졸업하고 승적을 가졌으나, 1924년 김기장(金琪莊)과 결혼하였다. 해방 후 현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2동의 동장을 역임하였다. 금정중학교의 범어사 3·1운동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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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차상명(車相明)은 1895년 아버지 차인수(車仁守)와 어머니 이수년(李守年)의 장남으로 동래군 동래면 교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범어사에 들어가 명정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3년 최학전(崔學傳)과 결혼하여 외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1945년 부산시 동래구 남산동에서 타계했다. 서울에서 거족적인 3·1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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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달수(崔達守)는 1916년 아버지 최성운(崔聖運)과 어머니 이금옥(李今玉)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에서 태어났다. 1932년 김기출(金己出)과 결혼하여 4남 4녀를 두었으며, 1962년 양산시 하북면 순지리에서 타계했다. 최달수는 1931년 4월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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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학선(崔學鮮)은 3·1운동 전후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양산청년회 운동·신간회운동·농민조합운동 등의 항일 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함으로써 ‘독립할배’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였다. 1918년 일본상인에 대항하기 위해 윤현진이 설립한 의춘상행(宜春商行)이란 소비조합에 참여하였으며, 1919년 3월 윤현진으로부터 의춘상행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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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한동선(韓東善)은 1915년 아버지 한암외(韓岩外)와 어머니 손숙이(孫淑伊)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28년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9년 김차열(金次烈)과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1966년 타계했다. 한동선은 1931년 4월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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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함성관(咸成寬)은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했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 구속 간부의 구출 작전에 다른 조합원과 함께 가담하여 정문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경찰서로 진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1932년 부산지방법원에서 벌금 5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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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홍인범(洪仁犯)은 1931년 4월 4일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의 일원으로 지주들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적극적인 농민 운동을 펼치다 1932년 3월 16일 양산경찰서에 수감되었다. 1932년 2월 20일 양산농민조합은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소작권 영구 확립, 지세 및 기타 공과금 지주 부담, 소작료 4할 등의 내용을 결의한 것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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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황만우는 범어사에 있는 중등학교 과정의 지방학림 학생으로서 1919년 3월 범어사 학생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학생 40여 명은 3월 18일 밤, 동래읍 서문(西門) 부근에서부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동래시장을 거쳐 남문(南門)에 이르기까지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9일 황만우 등 10여 명의 학생들은 동래시장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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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황소준(黃小俊)은 일제강점기 소작 관행을 혁신하기 위한 운동을 펼치다 일본 경찰에 검거된 양산농민조합의 간부이다. 1932년 2월 20일 양산농민조합이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소작권 영구 확립, 지세 및 기타 공과금 지주 부담, 소작료 4할 등의 내용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14일 양산농민조합의 조직부장 이봉재(李鳳在) 일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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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황원석(黃元錫, 법명 만우)은 1912년 범어사로 출가하여 수도승이 되었으며 1919년 당시 범어사의 보통학교 과정인 명정학교와 중등학교 과정(3년)인 지방학림의 동료 학생들과 함께 범어사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범어사의 만세 운동은 학생 의거로 일어났으나 불교계의 지도층이 뒤를 받치고 있었다. 1919년 3월 18...